AI 시대의 새로운 패러다임

지금까지 우리는 '기술이 필요를 만드는' 시대를 살아왔습니다.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데 드는 비용과 시간이 막대했기 때문에, 한 번 만들어진 기술은 그 자체로 해자가 되었습니다. 사용자 입장에서는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SaaSSoftware as a Service, 서비스형 소프트웨어 기업이 제공하는 서비스가 있으면, 아무리 우리 산업이 특수하고 우리만의 방식이 있더라도, 그 표준화된 규격에 맞춰서 적응하고 적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필요에 기술을 맞추는 게 아니라, 

기술의 틀에 우리의 필요를 끼워 맞춰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AI로 인해 이 구조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전통적인 SaaS 기반 소프트웨어 시장이 파괴되고 있고, 기업 맞춤형 특성화 소프트웨어에 대한 요구가 생겨나고 있는 것입니다. 더 이상 남이 만들어 둔 틀에 억지로 맞출 필요가 없어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이 변화 속에서 누가 승자가 될까요?

사용자 해자를 가진 특성화 산업의 부상

저는 이렇게 봅니다. 소프트웨어적인 필요가 분명히 있었지만 그동안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던 산업, 그러면서도 나름의 표준 규격과 고유한 업무 방식을 갖고 있는 특성화된 산업이 바로 그 답입니다. 그런 산업에서 자체 AI와 소프트웨어를 구축하고, 그것을 통해 서비스를 이어나가는 기업만이 살아남을 것입니다. 지난 글에서 언급한 '재미 없는 산업'들 중에서 찾아봐도 좋겠습니다. ※ 재미없는 산업이 사실 더 재미있다 | 슐렙비즈니스

결국 기술적 해자가 아니라 '사용자 해자'를 가진 기업이 살아남지 않을까요. 고객이 이미 구축되어 있고, 그 고객이 떠날 수 없는 구조를 가진 특성화된 산업의 사업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런 기업들이 더 견고하게 성을 쌓고 독점력을 갖추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외부의 대형 소프트웨어에 의존해서 큰 규모의 운영 체계를 유지하던 시대에서 벗어나, 소규모로 자기 규모에 맞춘 특성화된 기술을 자체적으로 개발하고, 수 있는 기업만이 앞으로 살아남게 될 것이라고 조심스레 예측해 봅니다.

역사가 반복되는 패턴

사실 이건 역사적으로 이미 한 번 겪었던 흐름이기도 합니다.

1차 산업 시대를 지나 2차 산업 시대에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이 등장했을 때, 이미 왕성한 소비자들의 수요는 공급을 능가하던 시기였습니다. 대량 생산이 그 갈증을 해소해줬죠.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과잉 공급이 발생했고, 기업들은 다각화하고 다품종 소량 생산을 해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 연장선상에서, 소프트웨어 영역에서도 똑같은 현상을 목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품종에서 다품종으로, 어떤 서비스가 살아 남을까?

대량 생산을 위해 막대한 자본으로 구축해야 했던 공장, 값비싼 공정이 이제는 필요 없어지고 있습니다. 소비자 스스로가 자신의 필요를 위한 생산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생산이 점점 더 소비자 맞춤형으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이걸 좀 더 쉽게 비유해보겠습니다. 3D 프린터를 생각해보시면 됩니다. 각 가정에서 3D 프린터로 자기가 원하는 형태의 도구를 만들고, 출력해서 사용하는 시대가 왔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전문가들이 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가정용 3D 프린터로 출력한 결과물이 사출 성형으로 만든 제품과 비교하면 얼마나 조악한지를 말입니다. 차원이 다르거든요. 책을 만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에 있는 가정용 프린터로 출력해서 복사집에 가서 제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실제 책의 형태와는 수준이 다르게 느껴지잖아요.

모두에게 도구가 주어진 시대, 그런데 품질의 차이는 여전히 존재하는 시대입니다. 저는 이 상황에서 소프트웨어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 서비스의 방향이 세 가지로 나뉜다고 봅니다.

품질의 갭을 줄여주는 서비스

누구나 도구를 가졌지만 결과물의 품질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갭을 줄여줄 수 있는 소프트웨어나 하드웨어적 모듈을 제공하는 기업은 분명히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조악한 출력물을 전문가 수준의 결과물에 가깝게 끌어올려주는 것, 이것이 첫 번째 기회입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필요를 만들어내는 서비스

사람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무엇이 필요한지, 어떤 걸 원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정말로 '필요'를 만들어낼 수 있는 기업이 성공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3D 프린터가 집에 있더라도 내가 무엇을 만들어야 할지, 무엇이 필요할지를 모르면 어떤 것도 출력할 수가 없거든요. 결국 온라인에 떠돌아다니는 도면만 다운받아서 출력해보고, 금방 싫증 내게 되는 것입니다. 도구가 있어도 방향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 그것이 두 번째 기회입니다.

시장 자체를 만들어내는 서비스

특정 시장을 형성해놓고 그 시장 안에 사람들이 계속 유입되고 활동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기업은 앞으로 더 성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정 기술 하나를 개발해서 납품하는 일회성 거래가 아니라, 지속적인 거래가 발생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입니다. 필요가 발생하면 공급이 생산되어 제공되는 시장, 그 시장 안에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들어오게 하는 것 자체가 해자가 됩니다. 사용자 해자를 갖춘 기업이 제공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서비스가 바로 이것입니다.

출판 산업의 변화 방향

출판이라는 영역으로 돌아와보겠습니다.

현재 책이라는 상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한 번 살펴볼까요. 저자가 원고를 만들고, 출판사에 투고합니다. 출판사에서는 편집, 교정, 교열, 디자인, 제작까지 전 과정을 담당하고, 완성된 책을 물류사에 입고해서 서점으로 출고합니다. 그리고 서점에서 유통이 이루어지죠.


원고 완성
출판사 제작
편집-교정·교열-디자인-제작-물류사 입고
서점 유통

도서 출판 프로세스

그런데 여기서, 서점에서 유통된 이후 마케팅 비용은 전적으로 출판사와 저자가 부담합니다. 서점은 진열대에 올려놓는 정도로 끝입니다. 돈이 투입되지 않으면 진열된 상태에서 더 도드라지게 배치해주는 것도 없고, 홍보를 위해 더 노출시켜주는 것도 없습니다. 심지어 신간이 구간이 되고 수요가 없으면 벽면 책장으로 이동하고 매장에 두지 않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열된 상태를 바꾸기 위한 모든 노력은 결국 저자와 출판사의 몫이었던 것입니다.

출판계의 오래된 갈증, 그것이 '필요'다

이것이 출판 시장에서 출판사와 저자가 오랫동안 느껴온 갈증, 즉 필요입니다. 책이라는 상품을 진열하는 데 있어서, 서점은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서점을 보면 책이라는 본래의 상품 외에 여러 가지 잡다한 상품들이 함께 진열되어 있잖아요. 저는 이 현상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점이 자신들이 서비스 이용자의 어떤 필요를 충족시켜야 하는지에 관심을 두기보다, 공간에 대한 부동산 임대 수익이라는 비즈니스 모델에 집중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시장은 '필요가 기술을 만드는'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기술을 먼저 만들고 필요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기술을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현재 출판 시장에서 정말로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출판사와 저자가 오랫동안 갈증을 느껴온 부분은 어디인지를 정확히 짚어내고, 거기에 맞는 기술과 서비스를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앞으로 출판이라는 산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고, 저희가 만들고 싶은 새로운 시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