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없는 산업이 재미있다

2012년, Y Combinator의 창립자 폴 그레이엄Paul Graham​이 짧은 에세이 하나를 썼습니다. 제목은 "Schlep Blindness." 슐렙Schlep​은 이디시어로 '지루하고 귀찮은 일'을 뜻합니다. 그가 던진 질문은 간단했습니다. 왜 똑똑한 사람들이 거대한 기회를 코앞에 두고도 못 보는 걸까?

그의 답은 이랬습니다. 귀찮아서.

더 정확히 말하면, 귀찮다는 걸 의식조차 못 하기 때문입니다. 은행과 싸워야 하고, 규제를 뚫어야 하고, 사람을 만나 설득해야 하는 문제 앞에서 우리의 무의식이 알아서 걸러버립니다. 그래서 결제 시스템이 엉망인 걸 10년 넘게 다들 알면서도, 사람들은 레시피 사이트나 동네 이벤트 앱을 만들었습니다. 결제 문제를 직접 풀어낸 건 Stripe였고, 지금 기업가치는 915억 달러입니다.

피터 틸Peter Thiel​은 같은 현상을 다른 각도에서 봤습니다. "경쟁은 패자들의 게임이다Competition is for losers​." 모두가 화려한 시장에 몰려드는 이유는 그게 매력적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건, 경쟁자가 이미 많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산업에는 경쟁이 없고, 경쟁이 없으면 독점이 가능합니다.

두 사람의 논리를 합치면 하나의 공식이 나옵니다.

지루한 산업 = 슐렙 맹점으로 인한 경쟁 부재 = 독점 기회

이론으로만 들리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 이 공식대로 움직인 사례가 이미 있습니다.

토스: 은행 송금이라는 '재미없는 문제'에서 시작한 슈퍼앱

치과의사 출신 이승건 대표가 2011년 비바리퍼블리카를 창업했을 때, SNS 앱과 투표 앱을 포함해 여덟 개 서비스가 연달아 실패했습니다. 아홉 번째로 꺼낸 것이 '간편 송금'이었습니다. 주변 반응은 차가웠습니다. 은행이 독점한 송금 시장을 스타트업이 건드린다는 건 무모해 보였고, 공인인증서 없는 송금은 당시 법의 테두리 밖이었습니다.

전형적인 슐렙이었습니다. 금융당국을 설득해야 하고, 은행 한 곳 한 곳을 찾아다녀야 하고, 규제가 풀릴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출시 2개월 만에 서비스가 중단되기도 했습니다. 대형 은행은 문을 열어주지 않아 전북은행, 우체국, 새마을금고 같은 작은 금융기관부터 하나씩 연동해 나갔습니다.

누구나 송금이 불편하다는 걸 알았지만, 아무도 이 문제를 풀려 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귀찮았으니까요. 그레이엄의 표현 그대로, 슐렙 맹점이 작동한 겁니다. 토스는 지금 누적 가입자 2,600만 명, 2022년 매출 1조 1,888억 원을 기록한 종합 금융 플랫폼이 됐습니다.

배달의민족: 전화 주문이라는 '원래 그런 것'을 의심한 결과

2010년, 김봉진 대표가 배달의민족을 만들었을 때 배달 음식 시장은 이미 거대했습니다. 다만 주문 방식이 전단지와 전화에 머물러 있었을 뿐입니다. 스마트폰으로 음식을 주문한다는 아이디어 자체는 대단한 게 아니었습니다. 대단한 건 그 뒤에 따라오는 슐렙을 감당한 것이었습니다.

식당 사장님 한 분 한 분을 찾아가 설득하고, 메뉴를 직접 입력하고, 결제 시스템을 연동하고, 배달 인프라를 구축하는 일. 화려한 기술이 아니라 발품과 반복의 영역이었습니다. 기존 플레이어들이 이 시장을 방치한 건 돈이 안 돼서가 아니었습니다. 너무 번거로웠기 때문입니다.

배달의민족은 2019년 독일 딜리버리히어로에 약 4조 8천억 원에 인수됐습니다. 전단지와 전화라는 '원래 그런 것'을 의심한 대가로는 상당한 금액입니다.

쿠팡: 택배라는 가장 지루한 전쟁에서 이긴 회사

쿠팡의 김범석 대표가 집중한 건 기술이 아니라 물류였습니다. 전국에 물류센터를 짓고, 배송 기사를 직접 고용하고, 새벽배송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습니다.

물류는 창업자들이 가장 피하고 싶어하는 영역입니다. 자본이 많이 들고, 수익화가 느리고, 운영이 복잡합니다. 화려한 앱 하나 만들어서 스케일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쿠팡이 한 번 자리를 잡자 아무도 따라올 수 없었습니다. 2021년 뉴욕증시에 상장, 시가총액 약 100조 원. 택배라는 가장 지루한 전쟁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재미없는 산업의 구조적 우위 세 가지

이 사례들을 관통하는 패턴이 있습니다.

첫째, 검증 비용이 낮습니다. 화려한 산업은 수요부터 만들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이걸 원할까?"부터 시작하는 거죠. 재미없는 산업에서는 이 질문이 필요 없습니다. 고통이 이미 존재하고, 돈을 쓸 사람도 이미 있습니다. 토스 이전에도 모든 사람이 송금의 불편함을 알고 있었고, 배달의민족 이전에도 배달 음식 시장은 수조 원 규모였습니다. PMF까지의 거리가 구조적으로 짧습니다.

둘째, 경쟁이 적습니다. 그레이엄의 표현대로 슐렙은 저평가된 주식과 같습니다. 본질적 가치는 높은데 수요가 적으니까요. 누구나 SNS 앱은 만들고 싶어하지만, 금융 규제를 뚫거나 물류센터를 짓고 싶어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바로 그래서 토스가, 쿠팡이, 배달의민족이 각자의 영역에서 독점에 가까운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셋째, 레거시가 해자moat​가 됩니다. 재미없는 산업은 대개 오래된 산업입니다. 오래됐다는 건 기존 플레이어들이 비효율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규제, 관행, 업계 네트워크—이런 것들이 신규 진입자에겐 장벽이지만, 해당 산업에서 오래 일한 사람에게는 오히려 자산이 됩니다. 이승건 대표가 8번의 실패를 거치며 금융 규제의 작동 방식을 체득한 것이 토스의 성공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창업은 레거시에서 빌드업됩니다

이 이야기들이 결국 가리키는 곳은 하나입니다.

가장 빠르게 PMF에 도달하는 창업은 '새로운 산업을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산업의 비효율을 정확히 아는 것'에서 나옵니다. 화려함이 아니라 익숙함에서. 발명이 아니라 재조합에서. 그리고 그 익숙함은 해당 산업에서 충분한 시간을 보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레이엄은 슐렙 맹점을 극복하는 방법도 알려줬습니다. "내가 어떤 문제를 풀어야 하지?"라고 묻지 말고, "다른 누군가가 나 대신 이걸 풀어줬으면 좋겠다"고 물어보라는 것입니다.

그 답이 떠오른다면, 아마 그건 꽤 재미없는 산업에 있을 겁니다. 그리고 바로 그게, 재미있는 부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