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인데 대출 같은 구조

한국 스타트업 투자의 핵심 쟁점은 상환전환우선주RCPS​입니다. 투자자가 원하면 자금을 회수할 수 있는 구조여서, 사실상 대출과 비슷한 성격을 띱니다. 스타트업이 실패하면 창업자가 빚을 져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미국 VC는 다릅니다. 10개 투자 중 1개 성공을 전제로 움직입니다. 나머지 9개가 실패해도 1개가 크게 터지면 되는 구조입니다. 초기 기술 검증 단계만으로도 수천만 달러가 들어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기술의 잠재력과 성장 곡선을 보고 판단하는 문화가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차이는 여기서 갈립니다. 한국에서는 "그게 될까?"라는 반응이 먼저 나옵니다. 미국에서는 같은 아이디어에 오히려 지지가 돌아옵니다. 스탠퍼드 캠퍼스에서 곽석영 씨가 본 풍경이 그랬다고 합니다. 한국 기준으로는 터무니없어 보이는 아이디어로 창업에 도전하는 학생들이 투자자의 응원을 받는 모습이었습니다.

출구가 하나뿐인 나라

투자 구조만 문제가 아닙니다. 돈을 회수하는 방법인 엑시트exit​경로도 극도로 제한적입니다.

한국에서 스타트업이 투자금을 회수하는 방법은 사실상 코스닥 상장 하나입니다. 대기업의 인수·합병M&A​이 거의 없기 때문이죠. IPO까지 가려면 수년이 걸리고, 그 사이에 자금이 마르면 끝입니다.

미국에서는 상장 말고도 길이 있습니다. 빅테크 기업들이 스타트업을 인수하는 일이 일상적입니다. 인수된 팀은 해산하지 않고 다시 창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패한 팀도 기술력이 있으면 인수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자본이 순환합니다. 창업자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다음 판이 열리는 구조입니다.

한국은 다릅니다. 실패하면 빚을 지고, 성공해도 상장이라는 좁은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창업자도 투자자도 부담이 클 수밖에 없죠. 이런 구조에서 "큰 꿈을 꾸라"는 말이 얼마나 공허할까요?

정부가 비료를 주었으면, 이제 토양이 필요합니다

한국 정부의 창업 지원이 없었다면 지금의 스타트업 생태계도 없었을 겁니다. TIPS 같은 프로그램은 초기 창업팀에게 실질적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계도 분명합니다.

삼성전자 부사장 출신으로 미국에서 AI 바이오 스타트업을 창업한 임근휘 CTO는 이렇게 지적합니다. "TIPS는 생태계에 비료를 주는 역할을 하지만, 정부 정책만으로는 생태계의 자발적 선순환을 만들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비료가 아무리 좋아도 토양이 척박하면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여기서 토양이란 민간 생태계입니다. 대기업이 스타트업과 협업하고 유망한 기술을 인수하며, 그 자본이 다시 새로운 창업으로 흘러가는 순환 구조 말입니다. 한국에는 이런 순환이 막혀 있습니다.

일부 정부 과제는 실제 사업성보다 과제 수행 능력에 따라 선정된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심사 과정에 창업 경험이 있는 전문가와 민간 투자자 참여를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죠.

인재가 떠나는 건 결과입니다

글로벌 인사 플랫폼 Deel의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AI 트레이너의 58.2%가 미국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1억 달러 이상 투자를 받은 스타트업의 55%가 미국에 본사를 두고 있습니다. AI 인재와 자본이 한 곳으로 쏠리고 있는 겁니다.

한국인에게 미국 창업이 쉬운 건 아닙니다. 언어 장벽이 있고, 인도나 중국 출신 창업자들에 비해 네트워크도 얇죠. 선배 창업가 풀도 부족합니다. 그런데도 미국행을 선호하는 이유는, 높은 진입장벽을 감수할 만큼 한국의 구조적 한계가 크기 때문입니다.

인재가 떠나는 건 원인이 아니라 결과입니다. 투자 구조가 바뀌지 않고, 엑시트 경로가 넓어지지 않고, 실패에 대한 부담이 줄어들지 않는 한, "한국에서 창업하세요"라는 말은 공허할 뿐입니다.

돈의 성격을 바꿔야 합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한국에 돈이 없는 게 아닙니다. 돈의 성격이 문제입니다. 투자라고 부르지만 회수 조건은 대출에 가깝고, 성공해도 출구가 좁으며, 실패하면 창업자가 빚을 져야 합니다. 이런 구조에서는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도 작게 시작하고 조심스럽게 움직일 수밖에 없죠.

미국이 모든 면에서 우월한 건 아닙니다. 경쟁은 훨씬 치열하고, 한국인이라는 조건은 분명한 핸디캡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떠나는 이유는 한국의 구조가 "큰 꿈"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SK하이닉스 부사장을 지낸 윤성희 에루디오바이오 대표의 말이 핵심을 찌릅니다. "미국 VC는 10개 투자 중 1개 성공을 전제로 혁신에 과감히 베팅한다. 한국은 여전히 단기 실적 중심 평가가 강하다."

10개 중 1개의 성공에 베팅하고, 나머지 9개의 실패를 생태계의 비용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벤처 투자의 원래 문법입니다. 한국의 투자 문화가 이 문법으로 돌아오지 않는 한, 인재와 아이디어의 유출은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정부가 아무리 비료를 뿌려도 토양이 바뀌지 않으면 뿌리를 내릴 수 없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