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국제수학올림피아드(IMO) 금메달 수준의 문제를 풀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런데 로봇 연구소 피지컬 인텔리전스Physical Intelligence의 표현처럼 아직도 빵에 땅콩버터를 바르지는 못합니다. 알파고AlphaGo가 바둑 세계 챔피언을 이겼을 때, 그 AI는 바둑돌을 스스로 집어 올릴 수 없었다고 합니다. 2026년인 지금도 AI는 수학 문제를 풀 수 있지만 연필로 답을 쓰지 못합니다. 이 기묘한 현상에는 모라벡의 역설Moravec's Paradox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어려운 건 쉽고, 쉬운 건 어렵다
1988년, 카네기멜론대학교 로봇공학자 한스 모라벡Hans Moravec이 이런 관찰을 내놓습니다.
"컴퓨터에게 지능검사나 체커 게임에서 성인 수준의 성과를 내게 하는 건 비교적 쉽다. 하지만 지각과 운동 능력에서 한 살짜리 아이 수준을 갖추게 하는 건 어렵거나 불가능하다."
10자리 숫자 곱셈, 수만 건의 판례 분석, 복잡한 통계 계산과 같이 인간에게 어려운 것은 AI에게 쉽습니다. 반대로 어질러진 바닥에서 장난감 집기, 대화 상대 표정 읽기, 계단 오르기처럼 인간에게 쉬운 것은 AI에게 극도로 어렵습니다.
왜 그럴까요? 모라벡은 진화에서 원인을 찾습니다. 걷기, 보기, 만지기 같은 능력은 수억 년에 걸쳐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이 최적화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반면 수학, 논리, 언어와 같이 추상적 사고는 인류 역사에서 아주 최근에 생긴 능력이라 아직 최적화가 덜 됐다는 게 모라벡의 설명입니다. 덜 최적화된 능력일수록 기계가 따라잡기 쉽다는 주장이죠.
쉽게 말하면, 우리 인간이 무의식적으로 하는 일일수록 AI가 흉내 내기 어렵습니다.
이 역설이 커리어에 의미하는 것
그러면 나는 커리어를 통해 뭘 키워야 하는 걸가요?
많은 직장인이 AI 시대를 대비한다며 코딩을 배우거나, 데이터 분석Data Analysis자격증을 따거나, 프롬프트 엔지니어링Prompt Engineering을 익힙니다. 틀린 건 아니지만, 모라벡 역설 관점에서 보면 방향이 좀 다릅니다. 코딩과 데이터 분석은 정확히 AI가 가장 잘하는 영역이거든요.
그러나 모라벡 역설을 커리어에 적용하면 이런 기준이 생깁니다.
매뉴얼로 설명할 수 있는 일은 위험하다.
"이 순서대로 하면 됩니다"라고 적을 수 있는 업무는 AI가 학습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보고서 양식 채우기, 정해진 기준으로 서류 분류하기, 데이터를 표로 정리하기같은 일은 이미 대체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능력이 안전하다.
"왜 그렇게 판단했어요?"라고 물었을 때 "글쎄, 그냥 느낌이요"라고밖에 답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거래처 담당자 말투에서 불안을 감지하는 것, 회의실 분위기를 읽고 발언 타이밍을 잡는 것, 팀원 컨디션 변화를 눈치채는 것들 말입니다. 이런 건 데이터로 변환할 수 없어서 AI가 학습할 방법이 없는 것이죠.
무의식의 가치가 올라가는 시대
하버드 버크만 클라인 센터Berkman Klein Center 아르빈드 나라야난Arvind Narayanan교수는 2026년 1월, 모라벡 역설에 대해 흥미로운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이 역설이 영원히 유효하진 않을 것이라고요. 컴퓨터 비전Computer Vision도 한때는 'AI가 절대 못 하는 것'이었는데, 2012년 딥러닝Deep Learning혁명 이후 순식간에 뚫렸습니다.
맞는 지적입니다. 슬라이스 치즈 비닐을 벗겨서 빵에 올려주는 로봇도 언젠가는 나올 겁니다. 그런데 한 가지 영역은 여전히 남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 신뢰를 쌓는 것, 갈등을 조율하는 것, 모호한 상황에서 결단을 내리는 것은 남아있지 않을까요? 이건 감각이나 운동 능력과는 다른 차원으로, 데이터가 아무리 많아도 인간이 10년간 같은 업계에서 쌓은 관계 맥락을 AI가 복제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모라벡의 역설을 통해 우리는 AI 시대 경쟁력이 '내가 의식적으로 잘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의식적으로 하고 있는 것'에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력서에 적을 수 없는 능력, 자격증으로 증명할 수 없는 감각이 앞으로 가장 비싼 역량이 되는 거죠. 우리가 매일 무심코 하는 판단과 소통에도 수십 년 경험이 들어 있습니다. AI는 그걸 아직 모른다는 것이 역으로 우리 경쟁력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