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반도체를 세계 1위로 만든 사람이 주말에 출근을 안 했다고 합니다. 예술가를 만나고, PD를 만나고, 비즈니스 밖의 사람들과 밥을 먹었습니다. 적자 사업부를 맡아 턴어라운드를 반복한 전문 경영인이, 칼퇴근과 위임으로 일했다고 합니다.
조선비즈 인터뷰에서 삼성전자 전 회장 권오현이 한 이야기입니다. 40년간 한 번도 인터뷰를 하지 않았던 사람이 입을 열었는데, 그 안에 리더십에 대한 날것의 통찰이 들어 있습니다.
냉장고 정리하러 회사 오지 마라
그가 임원들에게 한 경고입니다.
"냉장고 정리하고 유통기한 검사하고 싶으면, 집에 가서 해라. 회사 오면 직급에 걸맞은 일을 해야지."
불안하다고 지식과 정보를 독점하면 아랫사람이 클 수 못한다는 겁니다. 팀원의 일을 대신 해주면 당장은 깔끔하지만, 팀원이 성장하지 못하면 결국 모든 문제가 위로 올라옵니다. 이전 시대에는 틀리는 게 죄악이었으니 상사에게 깨지면 큰일 났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실수하더라도 그 부하직원이 실력이 늘잖아요. 빠른 전환자 시대에는 부하직원과 경쟁하면 안 돼요. 경쟁사와 경쟁하고 미래와 경쟁해야죠."
이 한 문장이 리더십의 방향을 정리합니다. 내가 더 잘하는 걸 보여주려고 팀원의 결과물을 고쳐주는 건, 경쟁 대상을 잘못 잡은 겁니다.
메시도 공을 1분밖에 안 잡습니다
실무적인 조언도 날카롭습니다.
메시도 호날두도 전체 경기 중 공 소유 시간은 1분이 채 안 된다는 겁니다. 오래 갖고 있으면 공격당하고 부상만 잦습니다. 결정적일 때 해결사 역할을 하면 됩니다."리더는 자신에게 온 공을 빨리 패스해야 합니다. 나는 문자도 메일도 보는 즉시 답을 줬어요. 공을 갖고 뭉개면 남는 건 번아웃입니다."
많은 리더가 반대로 합니다. 보고를 받으면 며칠 묵힙니다. 결재를 미루고, 피드백을 연기하고, 결정을 보류합니다. 그 시간 동안 팀원은 멈춰 있습니다. 리더가 공을 안 돌리면, 팀 전체의 속도가 리더 한 사람의 처리 속도에 묶이는 겁니다.
양궁과 클레이 사격
반도체 이야기지만, 사업 전략의 본질을 찌르는 비유가 있습니다. 메모리 반도체는 양궁입니다. 과녁이 명확합니다. 읽고 쓰는 기능을 더 빠르게, 더 작게, 더 효율적으로.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목표가 같습니다. 정밀하게 10점을 쏘는 기술. 한국이 잘하는 영역입니다.
비메모리 반도체는 클레이 사격입니다. 과녁이 움직입니다. 10년 전에 AI 칩이 필요할 거라고 어떻게 알겠습니까. 스마트폰 칩이 세상을 바꿀 거라고 누가 예측했습니까. 미국만이 이 움직이는 과녁을 쏘면서 시스템을 계속 정의해가고 있다는 겁니다.
'안 틀리는 기술'의 유통기한이 끝났습니다
교육에 대한 쓴소리도 있었습니다.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시대에는 '안 틀리는 기술'이 경쟁력이었습니다. 소니를 이기자, 인텔을 이기자, 분명한 타겟이 있었고, 낭비 없이 정밀하게 따라가는 전략으로 선진국 문턱까지 왔습니다. 성실한 모범생이 보상받는 구조였습니다."한국의 교육 시스템은 유치원 의대반부터 늦은 밤까지 '틀리지 않는 기술'만 배우잖아요. 그걸로 어떻게 AI를 이기겠어요?"
그런데 세상이 빠른 전환자Fast Mover의 시대로 바뀌었습니다. 어디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릅니다. 카피할 대상이 없습니다. 이 시대에 '틀리지 않는 기술'은 틀리지도 않지만 새로운 것도 만들지 못합니다.
그의 딸은 학원을 다닌 적이 없다고 합니다. 명문대는 못 갔지만, 행복하냐고 물었더니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그 딸도 자기 아이들을 학원에 안 보내고 있다고 합니다.
"꼭 명문대 나와야 행복한 건 아니니까."
미래를 질문하는 리더
인터뷰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이건희 전 회장에 대한 회고입니다.
이건희가 던진 질문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앞으로 어떤 미래가 오는지. 뭘 준비해야 하는지. 인재는 어떻게 키울 건지. 매출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질문. 그 질문을 받으면 "모르겠다"고는 할 수 없으니, 치열하게 연구할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이건희 회장은 한 번도 나한테 지시를 내린 적이 없어요. '매출 얼마야?'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어요. 리더가 매출만 질문하면 그 조직은 평생 발전을 못 합니다."
여기서 리더의 역할이 선명해집니다. 답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좋은 질문을 던지는 사람. 매출을 점검하는 사람이 아니라, 방향을 질문하는 사람. 그 질문의 수준이 팀의 수준을 결정합니다.
당장 돈이 안 된다고 버리면 벌어지는 일
HBM(고대역폭 메모리) 이야기도 뼈아픕니다. 권오현 재임 시절에 만들어서 엔비디아에 100% 납품하던 기술이었는데, 이후 이익률이 떨어지자 재무적 판단을 해버렸습니다. 미래를 준비하지 않은 거죠. 결과는 SK하이닉스가 HBM으로 대박을 낸 것이었습니다.
흑자를 내고 있는 사업이라도 쇠퇴하고 있다면 접어야 하고, 적자를 내고 있는 사업이라도 미래가 있다면 붙잡아야 합니다. 그는 삼성 디스플레이에서 흑자 사업이던 대형 LCD를 축소하고 모바일 OLED로 전환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당신 아들이 여기서 일하게 할 거냐?" 현재의 숫자가 아니라 미래의 방향을 보는 것. 리더에게 가장 어렵고, 가장 중요한 판단입니다."당장 돈이 안 된다고 버리면 이렇게 뼈아픈 결과를 맞아요."
빠른 전환자의 시대
인터뷰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는 하나입니다. 카피의 시대는 끝났다. 빠른 추격자에서 빠른 전환자의 시대로 바뀌었다. 이 전환을 인정하지 않으면, 개인도 조직도 국가도 헤맨다.
반도체뿐 아니라 모든 업에 적용되는 이야기입니다. 경쟁사를 벤치마킹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시장을 감지하고, 그 방향으로 빠르게 전환할 수 있는 역량이 필요합니다.
그 역량의 출발점이 무엇인지, 권오현은 자기 경험으로 보여줍니다. 주말에 사업 밖의 사람을 만나는 것. 팀원에게 실수할 기회를 주는 것. 공을 빨리 패스하는 것. 흑자 사업이라도 미래가 없으면 접는 것. 화려한 전략이 아니라, 판단하는 태도의 문제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