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한 HR 테크 스타트업이 3개월 만에 월 구독 고객 800명을 잃었습니다. 기능을 계속 추가했는데도요. 경쟁사가 같은 기능을 GPT 기반 플러그인으로 무료 제공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그 회사의 CEO가 털어놓은 말은 짧았습니다. "우리가 판 건 소프트웨어였는데, 고객이 원한 건 채용 속도였습니다."

이 사례가 가진 무게는 단순히 "경쟁이 치열해졌다"는 것에서 오지 않습니다. 소프트웨어의 기능이 빠르게 범용화되는 지금, 창업자가 고객에게 팔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더 근본적인 질문을 건드리기 때문입니다. 소프트웨어 구독 모델, 이른바 SaaS는 지난 10년간 스타트업 세계의 표준 공식이었습니다. 월정액을 받고, 기능을 업데이트하고, 이탈을 막는 구조. 투자자도 이 공식에 익숙했고, 창업자도 이 공식을 배웠습니다. AI와 LLM이 이 방정식의 전제를 흔들기 시작하면서, 피치 덱을 다시 써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기능이 상품이 되는 속도가 너무 빠릅니다

벤처 투자자이자 Navigate 공동창업자인 이반 니코(Ivan Nikkhoo)는 최근 Crunchbase News에 기고한 글에서 SaaS 창업자들이 직면한 변화를 구체적으로 짚었습니다. 핵심은 간단합니다. AI가 소프트웨어 기능의 범용화를 가속화했고, 그 결과 기능 자체로는 경쟁 우위를 유지하기 어려워졌습니다.

지난 2~3년 사이 SaaS 업계에는 여러 흐름이 겹쳤습니다. 2021년 최고점 대비 많은 SaaS 기업의 매출 배수가 절반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GPT-4 기반 신생 스타트업이 기존 SaaS가 10명의 팀으로 만든 기능을 2명으로 복제하는 일이 반복됐습니다. 고객 역시 "이 도구를 쓰면 우리 비즈니스에 무엇이 달라지는가"라는 질문을 더 자주, 더 날카롭게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니코가 경계하는 것은 이 상황에서 창업자들이 흔히 택하는 대응 방식입니다. 소프트웨어 경쟁이 치열해지면 컨설팅이나 매니지드 서비스를 덧붙이고 싶어집니다. 단기적으로는 매출이 붙지만, 확장성이 낮아지고 마진이 줄어듭니다. 소프트웨어 회사가 에이전시처럼 운영되기 시작하는 순간, 투자자는 다른 잣대를 꺼냅니다. 소프트웨어 배수가 아닌 서비스 배수로 평가받기 때문입니다. 더 큰 문제는, 이 방식으로는 핵심 질문인 "고객이 왜 계속 써야 하는가"에 답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SaaS가 무너진다는 진단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전에

물론 이 진단에 동의하지 않는 시각도 있습니다. Salesforce, ServiceNow, Workday 같은 엔터프라이즈 SaaS는 AI 도입 이후 오히려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AI를 외부 위협이 아닌 기능 강화 수단으로 통합하면서 고객 기반을 넓혔고, ARR도 안정적으로 늘렸습니다. "SaaS는 끝났다"는 선언이 과장이라는 근거는 충분히 있습니다.

성과 기반 가격 모델에 대한 회의도 적지 않습니다. 고객 성과를 어떻게 측정할 것인가, 성과 부진의 원인이 소프트웨어인지 고객 운영 방식인지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수익 예측이 불투명해지는 상황에서 투자자에게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아웃컴 기반 모델은 논리적으로 설득력이 있지만, 실제 도입에는 계약 설계·측정 인프라·조직 준비가 모두 필요합니다. 이 전환을 서두르다 현금흐름이 꼬인 스타트업도 있습니다. 모든 창업자에게 맞는 해법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은 인식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니코의 주장에는 무게가 있습니다. SaaS가 사라진다는 것이 아니라, 기능만으로 버티던 방식이 한계에 왔다는 것입니다. 이 차이를 흐리면 잘못된 처방을 내리게 됩니다.

워크플로 안에 박혀야 해지를 막을 수 있습니다

니코가 제안하는 생존 전략의 중심에는 "워크플로 소유권"이 있습니다. 단순히 도구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고객이 하루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작업 흐름 안으로 소프트웨어가 깊이 들어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현실적으로 왜 중요한가 하면, 기능 하나를 복제하는 것과 팀의 일상 업무 흐름 전체를 바꾸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결정이기 때문입니다. 전자는 경쟁사도 빠르게 할 수 있지만, 후자는 고객이 쉽게 결정하지 않습니다. 작업 흐름에 깊이 자리 잡은 소프트웨어는 이탈률이 낮고, 고객이 더 많이 쓸수록 수익이 함께 늘어나는 구조를 갖출 수 있습니다. 사용량 기반 또는 성과 연동 가격이 이 맥락에서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여기서 파이낸스 사고가 도움이 됩니다. 고객이 소프트웨어를 구매할 때 실제로 계산하는 것은 기능의 수가 아닙니다. "이 도구에 매달 50만 원을 내는 것이 우리 비즈니스에 어떤 숫자를 만들어내는가"입니다. 현금 지출이 어떤 수익성 개선으로 돌아오는지를, 투자 판단처럼 계산하는 고객이 늘었습니다. 그 언어로 먼저 대화를 여는 창업자와 기능 목록을 먼저 펼치는 창업자는 같은 제품을 팔더라도 전혀 다른 대화를 합니다.

AI를 어떻게 쓰느냐도 여기서 갈립니다. "우리 제품에 AI가 들어갔습니다"라는 문장과 "우리 제품을 쓴 고객의 처리 시간이 평균 40% 단축됐습니다"라는 문장은 길이만 다른 게 아닙니다. 전자는 기능 경쟁에서 또 하나의 체크박스를 추가하는 것이고, 후자는 고객의 업무 결과를 측정하고 증명하는 능력을 갖췄다는 신호입니다. 저는 이 차이가 지금 SaaS 피치에서 가장 중요한 갈림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소프트웨어를 팔기보다 워크플로를 장악해야 합니다

한국에서 혼자 SaaS를 만들거나 소프트웨어 기반으로 사업을 운영하는 분들에게 이 변화는 조금 다른 방향에서 닿습니다.

고객이 해지하는 이유를 직접 들어보셨다면 거기서 시작하면 됩니다. "가격이 비싸다"는 말은 많은 경우 "결과가 뚜렷하지 않다"의 다른 표현입니다. 그 말 뒤에 어떤 작업 흐름이 해결되지 않았는지를 찾는 것이 제품 방향의 단서가 됩니다.

당신의 소프트웨어가 고객의 업무에서 어느 위치에 있는지도 확인해야 합니다.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자리라면, 유사한 도구가 등장하는 순간 해지 결정은 빠르게 옵니다. 매일 아침 반드시 열어야 하는 도구가 되려면, 그 도구가 없을 때 무슨 일이 생기는지를 고객과 함께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 불편함이 클수록 방어력이 높아집니다.

AI 기능을 추가할 때도 같은 질문을 먼저 던져야 합니다. "이 AI 기능이 고객의 어느 업무를 얼마나 빠르게 처리하게 해주는가"를 수치로 말할 수 있는가.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고객이 돈을 계속 내는 이유가 됩니다. 말할 수 없다면, AI 기능은 일시적인 관심은 끌 수 있어도 장기 유지의 근거는 되지 않습니다.

니코가 강조하는 "딥 모트"는 1인 창업자에게 오히려 현실적인 경로를 제시합니다. 대형 플레이어와 같은 방식으로 경쟁하면 규모에서 집니다. 특정 업종, 특정 작업 흐름, 특정 고객군에 깊이 파고드는 쪽이 방어력을 만들어냅니다. 넓게 가면 규모가 필요하고, 좁고 깊게 가면 깊이가 자산이 됩니다.

SaaS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기능을 나열해서 팔던 방식으로는 버티기 어려워졌습니다. 고객의 작업 흐름 안에 깊이 자리 잡고, 그 결과를 숫자로 보여주는 창업자가 다음 단계로 갈 수 있습니다. 피치 덱의 첫 페이지가 성과 증명으로 채워지는 순간, 고객과 나누는 대화도 달라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