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미국 기술 미디어 CNET이 AI 생성 기사 77편을 조용히 게재했습니다. 처음 몇 주 동안은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석 달 뒤 외부 검증에서 오류와 표절이 확인됐고, CNET은 공개 사과와 함께 AI 활용 지침을 전면 재검토해야 했습니다.
같은 해 미국 법원에서는 더 황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한 변호사가 LLM이 만들어낸 허구의 판례를 소송 문서에 인용했다가 법정 제재를 받았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판결을 인용했던 것입니다.
이 두 사건은 같은 진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텍스트를 생성하는 일은 극적으로 빨라졌습니다. 그런데 그 텍스트가 믿을 만한지 판단하는 일은 빨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어려워진 것이죠.
이 변화의 한복판에 편집자가 있습니다. 출판 편집자가 사라질 거라는 예측이 한쪽에 있는 반면, 더 중요해질 거라는 주장 역시 다른 쪽에 있습니다. 어느 쪽이 맞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도구가 빨라질수록 판단 비용은 올라갑니다
먼저 가장 직관적인 오해부터 풀어보겠습니다. AI가 초안을 빠르게 생성하면 편집자가 검토할 분량이 줄어들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정작 현장에서 이 기대는 정반대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생성 속도가 빨라진 만큼 다뤄야 할 원고 편수도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한 편의 원고를 만드는 데 일주일이 걸리던 시절에는, 한 편집자가 한 달에 다룰 수 있는 원고가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지금은 AI가 하루에 여러 편의 초안을 뽑아냅니다. 그만큼 편집자 앞에 놓인 원고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각 원고에서 사실 오류와 문맥의 단절을 가려내는 작업이 더 까다로워졌습니다. 사람이 쓴 어색한 문장은 그 어색함이 검토의 단서가 되는데, 매끄럽게 정돈된 AI 텍스트는 그런 단서를 주지 않습니다. 오류가 더 깊이 숨어 있는 셈입니다.
즉, 텍스트 생성 비용이 0에 수렴할수록 편집 판단의 단가는 오히려 올라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들기는 쉬워졌는데, 만들어진 것이 믿을 만한지 판단하는 일은 더 어려워진 것이죠.
그러면 편집자는 도대체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만약 편집자의 역할을 단순히 맞춤법을 잡고 어색한 문장을 다듬는 것으로 보면 AI가 그 일을 대체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맞춤법 교정 소프트웨어는 2010년대 초반부터 편집실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지금의 AI는 그 작업을 더 잘하게 만들 겁니다.
그런데 편집자의 역량은 그 이전 단계에 있습니다. "이 원고가 독자에게 필요한가." "지금 이 시점에 출간할 이유가 있는가." "이 책이 어떤 독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 편집자의 진짜 일입니다.
LLM은 이런 질문을 설정하지 못합니다. 주어진 프롬프트에 답할 뿐입니다. 어떤 책을 만들어야 하는지를 묻고 시장과 시점과 독자를 함께 보는 일은 사람의 영역에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영역이 출판이라는 일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입니다.
저자와 독자 사이의 중재
편집은 저자의 의도와 독자의 이해 사이를 중재하며 오가는 작업입니다. 한 권의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면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자기가 쓰고 싶은 것을 씁니다. 독자는 자기가 읽고 싶은 것을 읽습니다. 이 둘이 자동으로 맞아떨어지지 않습니다. 저자가 5장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부분이, 독자에게는 가장 지루한 부분일 수 있습니다. 저자의 강박과 독자의 호기심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편집자가 연결자 역할을 합니다.
편집자가 저자와 원고를 함께 다듬는 과정에서 생기는 긴장과 타협이 책의 결을 만들어왔습니다. 그러나 AI가 생성한 텍스트에는 이 중재가 필요한 저자의 의도가 없습니다. 목소리도, 두려움도, 포기한 초고의 흔적도 없죠. AI 보조 원고가 늘어날수록 진짜 저자의 목소리를 어떻게 살릴지, AI가 만든 매끄러움 속에서 어떻게 인간의 흔적을 보존할지가 새로운 편집 과제가 됩니다.
책은 회수되지 않습니다
여기까지 읽고 "그래도 결국 편집자도 자동화될 거 아니냐"고 묻는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주장하는 기술 낙관론자들이 있습니다. LLM이 스타일 피드백, 독자 반응 예측, 제목 최적화까지 처리하게 되면 편집자의 기능적 역할은 좁아질 수밖에 없다는 주장입니다. 일부 디지털 미디어 기업은 이미 편집 인력을 줄이고 AI 검수 파이프라인으로 전환했고, 그 기업들이 망하지 않았으니 그 방향이 가능하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이 방향이 틀렸다고 단언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한 가지를 구별해야 합니다. 그 기업들이 만들어내는 것이 '책'인지, 아니면 트래픽을 얻기 위한 텍스트인지 말이죠.
트래픽이 목적이라면 AI 파이프라인이 효율적입니다. 만든 콘텐츠 중 일부가 잘못되어도 빠르게 내리고 다음 콘텐츠로 넘어가면 됩니다. 손실이 분산될 수 있죠.
그러나 책은 다릅니다. 출간되어 배포한 책은 회수가 불가능합니다. 독자가 산 책을 다 모아 폐기하기 쉽지 않습니다. 한 번 인쇄된 오류는 영구적입니다. 이 비대칭이 책이라는 매체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이 본질이 편집자의 역할을 다른 텍스트 산업과 구별합니다.
여기서 편집자는 마지막 방어선이 됩니다. 그리고 의심해야 하죠. "이게 정말 맞나"를 묻는 일이 직업의 역량입니다. AI는 자신이 만든 텍스트를 의심하지 않기에, 그 의심을 하는 것은 사람의 일입니다.
CNET 기자들의 사고도, 그 변호사의 법정 제재도 같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의심해야 할 자리에 의심을 두지 않은 자리. 출판 편집자가 같은 실수를 하면, 그 결과는 한 사람의 제재가 아니라 한 권의 책 전체가 됩니다. 영향의 범위가 다릅니다.
판단자로서의 편집자
결국 편집자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에 대해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저는 판단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판단이라는 것은 단순히 정보를 처리하는 게 아닌, 책임을 지는 일입니다. "이 원고를 세상에 내놓겠다"는 결정에는 출판사의 이름과 편집자의 안목이 함께 걸립니다. AI는 추천할 수 있고, 분석할 수 있고, 초안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내자"는 결정의 책임은 결국 사람이 집니다. 그 결정의 무게를 AI가 대신 질 수 없는 것이죠.
이 책임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도구가 정교해질수록 무거워집니다. 도구를 언제 쓰고 언제 멈출지, 어느 단계까지 AI에게 맡기고 어느 지점부터 사람의 판단으로 넘어갈지를 결정하는 일이 편집자의 새로운 일이 됩니다.
한국 출판 편집자에게 주는 함의
이 변화가 한국 출판에 주는 시사점은 분명합니다.
편집자의 안목이 출판사의 차별화 포인트가 됩니다. 맞춤법과 어색한 문장을 잡는 시간은 줄어듭니다. 대신 사실 검증과 판단의 시간이 늘어납니다. 같은 시간에 더 많은 원고를 다루지만, 각 원고에 들어가는 의심의 깊이는 더 깊어집니다. AI가 만들 수 있는 평균적인 콘텐츠는 누구나 만들 수 있는 시대에, 그 평균 위에서 무엇이 의미 있고 무엇이 시점에 맞는지를 판단하는 안목이 출판사의 자산이 됩니다.
AI 활용 지침이 출판사의 정체성을 만듭니다. 어느 단계까지 AI를 쓰고 어느 단계부터 사람의 판단으로 가는지를 명확히 한 출판사가 신뢰를 얻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경계가 모호한 출판사는 사고가 났을 때 더 큰 타격을 입습니다.
작은 출판사일수록 판단력이 더 중요해집니다. 큰 출판사는 여러 단계의 검토 절차로 한 사람의 실수를 걸러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1인 출판사나 작은 출판사는 그 안전망이 없습니다. 편집자 한 명의 판단이 책 전체의 운명을 결정하게 됩니다. AI 시대에 1인 출판사가 살아남으려면 판단의 정확도가 가장 큰 경쟁력이 됩니다.
멈추는 사람이 진짜 편집자입니다
출판의 시간표는 AI 때문에 빨라지지 않았습니다. 원고 초안은 8분 만에 나오지만, 그 원고가 책이 되기까지의 검토는 여전히 석 달이 걸립니다. 빨라진 부분과 그대로인 부분이 명확하게 나뉘었습니다.
도구는 점점 더 정교해지고 텍스트 생성은 점점 더 빨라질 겁니다. 그 속도 안에서 의도적으로 멈춰 서는 사람이 진짜 편집자입니다. AI가 만든 텍스트 앞에서 한 번 더 멈추는 사람, "이게 정말 맞나"를 묻는 사람, 자기 이름이 걸린 책에 책임을 지는 사람.
도구를 잘 쓰는 능력보다, 도구를 멈추게 하는 판단력이 중요해진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더 또렷해지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