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초, 미국 벤처 투자사에 제출된 IR 덱에는 거의 예외 없이 한 줄이 들어 있었다. "우리는 GPT를 활용합니다." 당시에는 그것이 실제로 신호였다. OpenAI API에 접근할 수 있는 팀이 한정적이었고, AI 기능을 구현하려면 머신러닝 엔지니어가 필요했다. 그것만으로도 경쟁자와의 차이를 만들 수 있었다.

지금 같은 문장을 피칭 덱에 넣으면 어떻게 읽히나.

AI 추론 비용은 2022년 이후 급격히 하락했다. 파인튜닝, 에이전트 구성, 멀티모달 처리—이 모두 개발자 한 명이 오픈소스 도구와 외부 API 조합으로 수일 안에 프로토타입을 만들 수 있는 영역이 됐다. "AI 기반"이라는 표현은 차별점이 아니라 제품이 갖춰야 할 기본 조건이 됐다. 그런데도 많은 팀이 AI 기능을 추가하는 데 개발력을 집중하고, 경쟁사가 같은 기능을 공개하면 다시 다음 기능을 추가하는 순환을 반복한다. 이 순환에서 선점 효과는 매 사이클마다 짧아진다.

AI 기능이 차별점으로 남지 못하는 이유

AI 기능이 경쟁 우위를 만들려면 경쟁사가 복사하지 못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AI 기능은 소수의 회사(OpenAI·Anthropic·Google·Meta)가 공개한 모델이나 API를 쓰는 것으로 구현된다. 같은 API를 호출하면 비슷한 출력이 나온다. 독자적인 모델을 개발하는 것은 수백억 원 이상의 GPU 인프라 비용이 전제돼야 하는 일이다.

이미지 생성 시장이 이 패턴을 잘 보여준다. 2023년 Stable Diffusion과 DALL-E를 기반으로 생성 이미지 서비스가 잇따라 출시됐다. 기능은 빠르게 수렴했고, 초기 선점자들이 유지한 우위는 브랜드 인지도와 사용자 워크플로 습관이었지, AI 기능 자체가 아니었다. 기능 차이가 사라지자 가격 경쟁이 시작됐다.

한국 시장에서도 같은 패턴이 반복된다. 법률 문서 검토, 세무 신고 보조, 고객 상담 자동화—각 영역에서 유사한 AI 서비스가 수개월 간격으로 등장했다. 기반 모델은 대부분 동일하다. 초기에 앞선 팀이 UI 완성도나 도메인 데이터로 격차를 만들었지만, 그 격차가 유지되는 기간은 짧았다.

파인튜닝이나 독자 데이터 파이프라인으로 성능 격차를 유지하는 팀도 있다. 그러나 그 격차를 유지하려면 데이터가 계속 쌓여야 하고, 데이터가 쌓이려면 사용자가 있어야 한다. 사용자를 끌어올 이유는 AI 기능 이외의 다른 곳에서 나와야 한다. 이것이 "AI 기능 개발 → 경쟁 우위 확보"가 아니라, 먼저 경쟁 우위를 만들고 그 위에 AI 기능을 얹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다.

카운터포지셔닝이 실제로 작동하는 조건

경영 전략에서 카운터포지셔닝(counter-positioning)은 신규 진입자가 기존 강자가 따라오기 어려운 방식으로 시장에 자리 잡는 전략이다. 기존 강자가 따라오지 않는 이유는 기술이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따라오는 순간 자신의 기존 사업 수익 구조를 스스로 갉아먹기 때문이다.

Notion이 자주 인용된다. 마이크로소프트는 Notion이 하는 것을 기술적으로 구현할 수 있고, 실제로 Loop를 출시했다. 그러나 Notion 방식으로 전면 전환하면 Word·Excel·Teams의 구독 매출에 직접 영향이 간다. 마이크로소프트가 Loop를 Office 생태계 중심으로 밀어붙이기를 주저하는 것은 그 매출 충돌 때문이다.

AI 시대에 이 구조는 더 뚜렷해진다. 기존 강자가 AI를 추가해서 자기 제품을 강화하면 되는 영역과, AI를 탑재하면 자기 제품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지워버리는 영역은 다르다. 신규 진입자가 후자의 위치에 있으면, 기존 강자는 따라오는 것 자체를 꺼린다.

경쟁사가 같은 방식을 채택할 때 어떤 일이 생기나경쟁사가 우리 방식을 그대로 따라온다AI 추가가 기존 제품 업그레이드경쟁사 기존 수익 강화선점 효과 빠르게 소멸AI 추가가 핵심 매출과 충돌경쟁사 기존 사업 훼손카운터포지셔닝 성립

카운터포지셔닝을 확인하는 질문은 하나다. 경쟁사가 우리 방식을 따라오면, 그쪽 기존 매출에 직접 타격이 가는가. 타격이 간다면 카운터포지셔닝이 성립할 가능성이 있고, 타격이 없다면 AI 기능이 아무리 정교해도 선점은 일시적이다.

카운터포지셔닝이 성립해도 영구적이지는 않다. 기존 강자가 자사 사업 구조를 스스로 바꾸기로 결정하거나, 외부 경쟁자가 동일한 위치를 선점하면 무너진다. 그러나 그 구조가 무너지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AI 기능 하나가 경쟁자에게 복사되는 데 걸리는 시간보다는 길다.

네트워크 경제가 성립하는 시점

네트워크 효과는 사용자가 늘수록 제품 가치가 오르는 현상이다. AI 제품에서 이것이 성립하려면 단순한 사용자 수 증가로는 충분하지 않다. 사용이 데이터를 만들고, 그 데이터가 AI 성능을 높이고, 높아진 성능이 다음 사용자에게 더 나은 경험을 제공하는 루프가 실제로 돌아가야 한다.

임상 의사 결정 지원 서비스 Regard AI가 이 패턴에 가깝다. 참여 병원이 늘수록 학습에 쓰이는 임상 케이스 데이터가 늘고, 데이터가 늘수록 진단 보조 정확도가 개선되며, 정확도가 오를수록 더 많은 병원이 채택한다. 새 경쟁자가 동일한 기반 모델을 써도 Regard가 수년간 축적한 임상 패턴은 단기간에 복제하기 어렵다. 데이터가 쌓일수록 새 진입자와의 격차가 벌어지는 경우다.

그러나 이런 데이터 네트워크 효과가 실제로 작동하는 AI 제품은 드물다. 많은 팀이 사용자 데이터를 수집하지만, 그 데이터가 모델 개선으로 연결되는 루프가 없다. 고객 문의 로그가 쌓이지만 응답 품질 향상에 쓰이지 않거나, 사용 패턴 데이터가 축적되지만 추천 로직 개선에 반영되지 않는다면, 데이터는 쌓이지만 네트워크 효과는 발생하지 않는다.

사용자가 100명이든 10만 명이든 100번째 사용자가 얻는 가치가 첫 번째 사용자와 같다면, 그것은 네트워크 효과가 아니라 단순한 서비스 확장이다. 네트워크 효과를 확인하는 질문은 하나다. 사용자가 10배 늘었을 때, 기존 사용자가 얻는 가치도 올라가는가.

AI 기능을 추가하기 전에 먼저 그려볼 것

카운터포지셔닝과 네트워크 경제는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경쟁 전략 연구에서 오래 다뤄온 틀이다. 미니 MBA 수준의 전략 교과서에도 들어 있는 내용이다. AI 시대에 이 두 가지가 다시 주목받는 이유는, AI 기능이 빠르게 평준화되면서 기술 자체로 지속 가능한 우위를 만들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1인 사업자나 초기 스타트업에게 두 가지를 동시에 갖추기는 쉽지 않다. 카운터포지셔닝은 기존 강자가 존재해야 성립하고, 네트워크 효과는 초기 임계 사용자 수에 도달하는 것이 전제다. 그렇다고 AI 기능 추가를 반복하면, 개발 비용만 쌓이고 선점 기간은 매 사이클마다 짧아진다.

현실적인 출발점은 진입하는 영역에서 기존 강자가 따라올 때 어떤 일이 생기는지를 먼저 그려보는 것이다. 강자가 같은 AI 기능을 출시해도 손해 볼 것이 없다면, AI 기능을 추가하는 것은 시간을 버는 것이지 우위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기능은 전략의 한 부분이지 전략 자체가 아니다. "이 기능을 경쟁사가 복사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라는 질문을 개발 착수 전에 던지는 팀이, 그 질문을 나중에 던지는 팀보다 오래가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