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na's Archive가 올해 공개한 블로그 포스트가 Hacker News에 올라왔을 때, 댓글란은 둘로 갈렸습니다. "이건 문화 범죄다"와 "사업 운영상 완전히 합리적이다"가 거의 동시에 올라왔습니다. 475포인트, 822개 댓글이 달렸는데, 두 진영이 같은 사실을 보면서 이렇게 다른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이 처음에는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포스트의 핵심 주장은 이렇습니다. AI 기업들이 훈련 데이터 확보 목적으로 희귀 도서를 수집하고, 디지털 스캔이 끝나면 원본을 물리적으로 처분했다는 것입니다. "범죄"라는 반응은 희귀본 보존의 관점에서 나왔고, "합리적"이라는 반응은 기업 운영 논리의 관점에서 나왔습니다. 두 반응이 동시에 옳을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사건을 따라가면 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AI 기업들이 그 책에서 실제로 무엇을 가져갔고, 무엇을 버린 것인가.
같은 책에서 희귀본 수집가와 AI 기업이 원하는 것은 겹치지 않습니다
희귀본이 경매에서 높은 가격에 낙찰되는 이유를 들여다보면 공통된 패턴이 있습니다. 최초 인쇄 부수가 적었거나, 세월이 지나 현존하는 수가 줄었거나. 두 경우 모두 그 책의 가격에서 텍스트가 차지하는 비중은 작습니다.
구텐베르크 성경을 예로 들면, 그 책에 담긴 성경 텍스트의 가치는 거의 없습니다. 텍스트는 어디에서든 구할 수 있습니다. 가치는 1450년대에 그 금속 활자로 그 종이 위에 찍혔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희귀본 시장은 어떤 의미에서 "사본(copy)으로서의 지위"를 거래합니다. 내용이 아닌 존재 자체를 삽니다.
AI 훈련 데이터 시장은 다릅니다. 여기서 가치 있는 것은 텍스트입니다. 어떤 시대의 잉크로 찍혔는지, 어떤 종이가 사용되었는지, 제본 방식이 무엇인지는 현재 AI 훈련 파이프라인에서 의미 있는 입력값이 아닙니다. 그 책에 담긴 어휘, 문장 구조, 시대 언어, 독특한 서술 방식이 목표입니다.
결국 같은 책을 두고 두 시장은 서로 다른 객체를 거래하고 있습니다. 한쪽은 "이 사본의 존재"를 사고, 다른 쪽은 "이 사본의 내용"을 삽니다. 이 구분이 뚜렷해지기 전에는 스캔 후 파기가 왜 일어나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파기가 내부 논리를 갖는 전제, 그리고 그 전제의 균열
스캔이 끝난 뒤 원본을 처분하는 행동은, AI 기업의 경제 논리 안에서 일관성이 있습니다. 디지털 파일이라는 목표물은 이미 확보했습니다. 남은 종이 묶음은 보관 공간을 차지하고, 운반 비용이 들며, 처분 과정에서 법적 복잡성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파기는 가장 단순한 마무리입니다.
다만 이 논리가 성립하려면 전제 하나가 참이어야 합니다. 종이 원본에서 디지털화로 이전되지 않는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전제를 검토하면 이야기가 복잡해집니다. 도서관학과 서지학에서는 책의 물질성이 텍스트와 별개의 정보를 담는다고 봅니다. 어느 페이지가 얼마나 닳았는가, 여백에 이전 소유자가 무엇을 남겼는가, 어떤 시대의 제본 관행을 따르는가 — 이것들은 그 책이 어떻게 읽히고 유통되었는지에 관한 증거입니다. 텍스트가 아니지만, 그 텍스트의 역사를 기록합니다.
현재 스캐닝 기술로 이 정보를 완전히 포착하기 어렵고, 포착된다 해도 텍스트 학습에 집중하는 AI 파이프라인에서 체계적으로 처리되지 않습니다. Anna's Archive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 이 주장은 아직 제3자 독립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 AI 기업들은 자신들이 정의한 가치만 추출하고 나머지를 버린 것입니다. 그 나머지에 다른 종류의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는 그들의 판단 범위 밖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미 공유된 텍스트로는 AI 경쟁 우위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이 생겼습니다. AI 기업들은 왜 디지털화된 현대 자료가 풍부한 상황에서 굳이 물리적 희귀본을 구해야 했을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웹페이지, 뉴스 기사, 공개 논문, 전자책 — 인터넷에 이미 올라와 있는 텍스트는 대부분의 AI 모델이 공통으로 학습한 자료입니다. 같은 자료로 훈련된 모델들은 비슷한 능력의 천장을 가집니다. 경쟁 우위는 다른 모델이 갖지 못한 데이터에서 나옵니다.
아직 디지털화되지 않은 텍스트 — 절판된 전문서, 특정 학술 기관이 보유한 미공개 자료, 특정 언어권의 희귀 문헌 — 는 이 맥락에서 독점 가능한 훈련 자원이 됩니다. 공개 경매에서 구매하거나, 수집가에게 직접 매입하거나, 도서관이나 학술 기관과 데이터 파트너십을 체결하는 방식으로 확보됩니다.
파트너십 방식에서는 기관이 보유한 자료를 AI 훈련 목적으로 스캔하도록 허용하는 계약이 체결됩니다. 기관이 받는 보상이 무엇인지, 원본에 대한 기관의 접근권이 계약 후에도 유지되는지, 스캔 데이터의 독점 사용 기간이 어느 정도인지 — 이 조건들은 계약서 안에 있고 외부에 거의 공개되지 않습니다. 기관의 입장에서는 디지털화 비용을 절감하는 거래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어떤 권한을 이전하는지 사전에 파악하기 쉽지 않습니다.
희귀본의 물리적 파기가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 거래 구조의 논리적 귀결입니다. 데이터를 독점하고자 한다면, 원본을 다른 누군가가 다시 스캔할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파기는 재스캔을 막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출판 계약에 AI 훈련 목적 사용 허용 여부 항목이 아직 없습니다
이 지점에서 출판 기획자, 저자, 콘텐츠 디렉터가 직접 마주하는 문제가 나타납니다.
전통적인 저작권 체계는 복제를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책을 재인쇄하거나, 번역하거나, 영상물로 전환하는 경우 저자의 동의와 보상이 따릅니다. 이 체계는 "내용을 다시 사용하는 것"에 저자의 권리가 있다는 전제 위에 있습니다.
AI 훈련은 이 전제와 다르게 작동합니다. 텍스트를 처리해 모델 가중치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텍스트 자체는 최종 산출물에 그대로 남지 않습니다. 이것이 "복제"에 해당하는가에 대해 각국 법원은 다른 판단을 내놓고 있고, 미국에서 진행 중인 여러 소송은 2026년 현재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법적 결론과 별개로, 경제적 구조의 변화는 이미 진행 중입니다. 출판물은 이제 두 종류의 시장에서 동시에 가치를 가질 수 있습니다. 독자가 콘텐츠로 소비하는 시장과, AI 기업이 훈련 자원으로 처리하는 시장. 두 시장은 같은 저작물에 대해 완전히 다른 가격을 매기고, 다른 방식으로 소비합니다.
한국 출판 계약에서 "AI 훈련 목적 사용 허용 여부"를 별도 항목으로 다루는 것은 아직 표준이 아닙니다. 이 항목이 없는 계약은 어느 방향으로든 해석될 수 있습니다. 나중에 분쟁이 생겼을 때 "허용하지 않았다"는 주장과 "금지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충돌하면, 계약서가 해결의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출판사와 저자가 앉아서 계약을 협의할 때, 이 항목을 어떻게 처리할지는 선택의 문제입니다. 완전 금지, 조건부 허용, 별도 보상 조건 부과 — 어떤 선택이든 가능하지만, 선택을 하지 않으면 그 공백이 남게 됩니다.
이 추적에서 분명해진 것과 아직 열린 것이 있습니다. 분명해진 것은, 희귀본 거래에서 AI 기업이 원하는 가치와 보존 기관이 지키려는 가치는 처음부터 겹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같은 책을 두고 서로 다른 것을 원했으니, 거래가 끝난 뒤 한쪽이 가져간 것은 다른 쪽이 잃어버린 것입니다. 스캔 후 파기는 그 구조의 끝에 있는 행동입니다.
아직 열린 것은, Anna's Archive의 구체적 주장 — 어떤 기업이, 어떤 규모로, 어떤 경로에서 — 이 독립 검증되지 않았다는 것과, 현행 저작권법이 AI 훈련에 어떻게 적용될지가 각국 사법부에서 판단 중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추적이 도달한 질문 하나가 남습니다. 다음 계약서를 쓸 때, AI 훈련 목적 사용 조항을 어떻게 넣을 것인가. 지금 이 항목을 넣는 것과 넣지 않는 것의 차이는, 나중에 그 계약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가의 차이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