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Adobe의 Figma 인수 계획에 공식 제동을 걸었습니다. 계약 규모는 200억 달러, 한화로 약 28조 원이었습니다. 미국 법무부도 비슷한 시기에 반독점 소송을 준비했고, Adobe는 결국 2024년 초 인수 자체를 포기했습니다. 당시 많은 관측자들은 Figma가 가장 좋은 출구 기회를 잃었다고 봤습니다. 소프트웨어 스타트업에게 200억 달러짜리 인수 제안은 창업자에게 흔히 오지 않는 기회이고, 그것이 외부 요인으로 무산됐을 때 회사의 사기와 방향성 모두에 타격이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수 무산 이후 Figma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독자 노선을 택한 뒤 AI 기능을 공격적으로 추가하고, 개발자 협업 기능을 확장하며 플랫폼을 키워 나갔습니다. 그리고 CEO Dylan Field는 최근 인터뷰에서 AI가 자사에 "역풍이 아니라 순풍"이라고 말했습니다. 회사의 가장 큰 위협으로 거론되던 것이 실은 성장 동력이 된다는 주장입니다.

이 발언이 한국 1인 기획자·솔로 PM에게 읽어볼 만한 이유는, Figma의 사업 전망 때문만이 아닙니다. 디자인 도구 시장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1인 실무자의 일하는 방식에 직접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AI가 'Figma 무용론'을 꺼내 든 배경

Figma는 2012년 창업한 이후 디자인 협업 소프트웨어의 표준을 바꿔 놓았습니다. 브라우저 기반 실시간 협업이라는 개념은 당시로서는 낯설었고, Adobe XD와 Sketch가 지배하던 시장을 빠르게 재편했습니다. 전 세계 수백만 명의 디자이너·개발자·PM이 Figma를 통해 협업하게 됐고, 이 플랫폼 없이 제품 개발 사이클을 돌리는 팀이 드문 시절이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2024년 이후 구도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ChatGPT, Claude, Gemini 같은 대형 언어 모델이 일상 도구가 되면서, 코드 생성에 직접 연결한 도구들이 쏟아졌습니다. Vercel의 v0.dev는 자연어 입력만으로 React 컴포넌트를 즉시 만들어 내고, Bolt.new와 Lovable은 텍스트 몇 줄로 웹 앱 전체를 구성합니다. 디자인 과정을 건너뛰고 바로 코드로 결과물을 뽑아내는 방식이, 특히 스타트업과 1인 개발자 사이에서 확산됐습니다.

이 흐름 속에서 "Figma를 굳이 써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나왔습니다. 규모 있는 팀에서 디자인 시스템을 공유하고 수정 이력을 관리하는 용도라면 여전히 유효하지만, 초기 프로토타입이나 MVP를 만들 때는 AI 코드 도구 하나로 충분하다는 의견이 늘었습니다. 유료 플랜을 유지하면서까지 쓸 이유가 줄었다는 이야기가 소규모 팀 사이에서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Field의 논리, 그리고 그것을 의심하는 시각

Dylan Field는 이 흐름에 다른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AI 도구가 코드 생성 속도를 높일수록,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야 하는지를 정의하는 단계의 무게가 커진다는 논리입니다. 코드가 더 빠르게 나올수록 그 코드가 구현해야 할 화면의 외관과 흐름을 미리 정리하는 작업이 더 중요해진다는 것입니다. Figma는 그 단계를 담당하는 도구이기 때문에, AI가 확산될수록 오히려 더 많이 쓰일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실무에서 AI 코드 도구를 써본 사람이라면 이 논리가 완전히 낯설지는 않습니다. 자연어로 화면을 묘사하는 것과 화면을 직접 설계해서 보여주는 것은 결과물의 정밀도에서 차이가 납니다. 모호한 언어 지시는 모호한 결과를 낳습니다. 시각화된 설계 도면이 AI에게 더 정확한 입력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 Field가 강조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이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입장도 상당합니다. AI 코드 도구가 계속 발전할 경우, 자연어 묘사만으로도 충분히 정밀한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되는 시점이 올 수 있습니다. 이미 일부 도구는 스크린샷 하나를 올리면 코드로 변환해 주는 기능을 갖추고 있습니다. Figma에서 화면을 만들고 그것을 AI에게 넘기는 흐름 대신, AI가 화면 초안을 먼저 제시하고 사용자가 수정 지시를 내리는 방향으로 작업 방식이 이동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협업 가치에 대한 반론도 있습니다. Figma가 강점으로 내세우는 실시간 협업 기능은 팀 규모에 비례해 가치가 커집니다. 디자이너 여러 명이 동시에 작업하고, 개발자가 디자인 파일에서 직접 스펙을 꺼내 쓰는 환경에서는 Figma의 역할이 뚜렷합니다. 하지만 1인 기획자나 2~3인 팀에게 그 장점은 상대적으로 작습니다. Field가 말하는 '순풍'이 조직 유형에 따라 다르게 체감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디자인 감각이 기획자의 실무로 이동하는 과정

이 논쟁에서 실무자가 건져낼 수 있는 것은 도구 선택의 답이 아닙니다. AI가 UI 생성의 문턱을 낮추면서, 시각적 설계 감각이 '디자이너의 전문 영역'에서 기획자가 직접 다루어야 하는 실무 영역으로 자리를 옮기고 있다는 흐름입니다.

과거에는 기획자가 기능 명세서를 쓰면 디자이너가 화면을 만들었습니다. 기획자가 화면의 외관이나 흐름에 개입하는 범위는 제한적이었습니다. 지금은 달라졌습니다. PM이 와이어프레임을 직접 잡고, 개발자가 화면 흐름을 검토하며, 마케터가 배너 레이아웃을 조율합니다. AI 도구가 진입 장벽을 낮춘 결과, 화면을 다루는 사람의 범위 자체가 넓어졌습니다.

이 변화에는 간과하기 쉬운 함의가 있습니다. 어떤 서비스가 사용자에게 신뢰를 주는지, 어떤 화면이 구매 결정을 앞당기는지, 어떤 레이아웃이 이탈률을 낮추는지는 기능 구현의 문제가 아닙니다. 소비자가 처음 화면을 봤을 때 느끼는 완성도와 친숙함은 비즈니스 성과와 직결됩니다. 어떤 형태의 제품이 더 잘 팔리는지를 설명할 때, 기능 목록보다 외관과 감각이 구매 결정에 앞서 작동한다는 사실은 디자인 현장에서 이미 오래된 관찰입니다. AI 코드 도구가 아무리 빠르게 화면을 만들어 내도, 그 결과물이 목표에 맞는지 가려내고 수정을 지시하는 역할은 여전히 사람의 안목에 달려 있습니다.

그 안목을 갖춘 기획자와 그렇지 못한 기획자 사이의 격차는, 도구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더 선명하게 드러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금 실무에서 시작할 수 있는 것

우선 외주 디자이너에게 의존하는 작업의 비중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화면 하나를 수정하는 데 며칠씩 기다리는 구조가 남아 있다면, AI 도구와 기본 디자인 도구를 함께 활용해 그 병목을 직접 해소할 환경이 이미 갖춰져 있습니다. Figma 무료 플랜이나 유사 도구로 화면을 '완벽하게' 만드는 것이 목표일 필요는 없습니다. AI 코드 도구에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수준'으로 만드는 것이 현실적인 출발점입니다.

AI 코드 도구와 디자인 도구를 어느 순간에 각각 쓸지 기준을 세워두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AI 코드 도구는 아이디어를 빠르게 화면으로 만들어 주지만, 사용자 흐름의 세부 의도를 정밀하게 조율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디자인 도구는 시간이 더 걸리지만 레이아웃과 시각적 위계를 손으로 다듬을 수 있습니다. 어느 하나에만 기대면 속도를 얻고 정밀도를 잃거나, 그 반대의 상황이 됩니다.

화면을 직접 다루다 보면 "이 레이아웃이 왜 어색한가", "이 색 조합이 왜 신뢰를 주지 못하는가"에 대한 언어가 생깁니다. 그 언어가 있어야 AI 도구에 정확한 수정 지시를 내릴 수 있고, 디자이너와 협업할 때도 더 구체적인 피드백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지금 기획자에게 가장 적은 투자로 가장 넓은 범위를 커버하는 역량 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AI 도구가 빨라질수록, 그 결과물을 걸러내는 감각의 실무적 가치는 함께 올라갑니다.

Figma가 28조 원 인수 제안이 막힌 뒤 스스로 길을 만들어 온 것처럼, 지금 1인 기획자 앞에도 비슷한 갈림길이 놓여 있습니다. 외주 구조에 기댄 채 도구 패러다임이 바뀌는 것을 지켜볼 수도 있고, AI 도구가 열어 준 문을 통해 스스로 처리할 수 있는 범위를 넓혀갈 수도 있습니다. Field가 AI를 '순풍'이라고 부른 이유는 Figma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닐 수 있습니다. 화면을 이해하는 기획자에게도 그 바람은 같은 방향으로 불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