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년간 단 한 번도 자체 의견을 사설로 낸 적이 없는 언론사가 있습니다. Associated Press, AP통신입니다. 1846년 뉴욕의 신문사 여섯 곳이 비용을 나눠 전신 서비스를 공동 이용하기 위해 만든 이 기관은 남북전쟁을 기록했고, 두 차례 세계대전을 보도했으며, 인터넷이 뉴스 산업 전체를 뒤흔든 2000년대를 버텼습니다. 그리고 지금, 생성형 AI라는 새로운 파도 앞에서 AP는 또 한 번 선택의 자리에 섰습니다.
AP통신 CEO 데이지 비라싱엄(Daisy Veerasingham)이 공개 인터뷰에서 꺼낸 말은 단순합니다. "어떤 사업 구조도 협상할 수 있지만, 편집 독립성은 협상하지 않는다." 180년을 살아남은 기관이 AI 앞에서 가장 먼저 붙잡은 것이 수익 모델도, 기술 로드맵도 아니었다는 점은 1인 콘텐츠 사업자·지식 창업자에게도 번역이 가능한 질문을 담고 있습니다.
이미 10년 넘게 AI와 일해온 언론사
AP통신은 AI를 거부하는 쪽이 아닙니다. 이미 2010년대 중반부터 기업 실적 보도, 스포츠 경기 결과처럼 정형화된 데이터를 자동으로 기사로 변환하는 작업에 자동화 시스템을 도입했습니다. 연간 수천 건 단위의 보도가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고 배포됩니다. 생성형 AI가 대중화되기 훨씬 전부터 AI와 공존해온 셈입니다.
그런 AP가 최근 AI 파트너십과 전략을 논의하면서 가장 강조한 것은 생산성이나 비용 절감이 아니었습니다. 신뢰의 경제학, 좀 더 정확하게는 "신뢰를 잃는 비용"이었습니다. AI로 기사 한 편을 만드는 비용은 측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AI가 오류를 냈거나, 취재 판단이 흔들렸다는 의심을 독자에게 한 번 받으면 그 관계를 회복하는 비용은 수치로 잡기 어렵습니다. AP는 그 비대칭을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AP통신이 AI를 다루는 방식에는 뚜렷한 구분선이 있습니다. 정형 데이터를 기사로 변환하는 작업, 기존 콘텐츠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작업, 방대한 아카이브를 검색 가능하게 만드는 작업은 자동화 영역으로 둡니다. 반면 어떤 사건을 취재할 것인지, 어떤 각도로 프레이밍할 것인지, 사실 확인을 어느 수준까지 할 것인지는 사람이 판단하는 영역으로 유지합니다. 이 경계선이 흐려지는 순간이 곧 AP가 말하는 취재 자율성이 흔들리는 순간입니다. 어느 쪽이 더 효율적인가가 아니라, 어느 쪽이 독자와의 관계를 해치는가가 판단 기준입니다.
"편집 독립성"이 방패가 될 때
이 대목에서 정직하게 반론을 꺼낼 필요가 있습니다. "편집 독립성"은 언론계에서 워낙 자주 쓰인 말이라, 그 자체로 방어막이 되기도 합니다. AI 도입에 반대하는 기자조합이나 편집국이 "편집권 침해"를 이유로 자동화를 거부할 때, 그것이 독자를 위한 선택인지 기존 인력 구조를 지키기 위한 선택인지 외부에서는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일부 미디어 연구자들은 오래된 언론 기관이 내세우는 취재 독립 원칙이 사실상 기존 수익 구조와 편집권을 쥔 집단의 이해관계를 보호하는 논리로 작동한다고 비판합니다. 정형 기사를 자동화한다고 해서 보도의 공정성이 당장 훼손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기자가 더 깊은 취재에 집중할 여력을 만들어 준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AP 자신도 AI 기업과의 데이터 라이선싱 협상을 진행해 왔으며, 어디까지를 "협상 가능"으로 볼 것인지의 선은 생각보다 유동적입니다.
이 비판은 틀리지 않습니다. 원칙이 선언으로만 반복되면 껍데기가 됩니다. AP통신이 다른 언론사와 달리 보이는 이유는 선언 자체가 아니라, 그 원칙이 수익 모델을 결정하는 자리에 실제로 개입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AI 파트너십을 맺을 것인가, 어떤 데이터를 외부에 제공할 것인가를 결정할 때 "이것이 우리의 취재 판단을 외부에 종속시키는가"가 실제 질문으로 올라온다는 것이 다릅니다. 원칙이 협상 테이블에서 작동하는 기관과, 선언문에만 적혀 있는 기관의 차이가 거기서 납니다.
콘텐츠 자산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에게
AP통신의 사례가 한국 1인 콘텐츠 사업자, 솔로 기획자, 지식 창업자에게 의미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180년이라는 시간차는 크지만, 질문의 구조는 비슷합니다.
콘텐츠를 만들어온 사람이라면 어느 순간 이런 경험을 합니다. AI 도구를 도입하면서 생산량은 올라가는데, 몇 달 지나 독자에게서 "요즘 글이 좀 달라진 것 같다"는 말을 듣는 순간. 또는 글 한 편이 예상보다 크게 퍼지면서 협찬 요청이 쏟아지고 "이 방향으로 콘텐츠를 만들어 달라"는 제안이 들어올 때, 어디서 멈춰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순간. AP통신이 180년에 걸쳐 반복해온 질문이, 1인 사업자 규모에서는 훨씬 짧은 시간 안에 찾아옵니다.
브랜드를 처음부터 정교하게 설계해서 시작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뭔가를 만들면서, 그게 쌓이면서, 나중에 돌아보면 거기에 일관된 결이 있었다는 걸 발견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계속 이어온 행위 속에 자산이 만들어집니다. 문제는 그 자산이 무엇인지 의식하지 않은 채로 도구가 바뀌면,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소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생산 속도가 올라가는 바로 그 순간, 콘텐츠의 어떤 결이 희석되는지 감지하지 못하는 일이 생깁니다.
AP통신이 AI 파트너십을 논의할 때 가장 먼저 꺼내는 질문은 번역이 어렵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취재 자율성을 외부에 내어주는가"는 "내가 새로운 도구를 도입하거나 외부와 협력할 때, 이것이 내 콘텐츠의 어떤 부분을 타협하게 만드는가"가 됩니다.
먼저 정해야 할 것의 순서
점검해볼 수 있는 지점들이 있습니다.
AI 도구를 쓸 때 어떤 판단을 위임하고 있는지를 의식하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글의 초안을 AI로 만드는 것과, 어떤 주제를 다룰지를 플랫폼 알고리즘 추천에 맡기는 것은 레벨이 다른 결정입니다. AP가 정형 기사는 자동화하면서도 취재 우선순위는 사람이 결정하는 구조를 지키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어디까지를 도구에 넘기고 어디서부터 판단을 직접 쥘 것인지, 그 선을 의식적으로 그어본 적이 있는지 물어볼 만합니다.
파트너십·협찬·수익화 구조를 검토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AP통신은 AI 기업과 계약을 맺을 때 자사 콘텐츠가 어떤 방식으로 학습·배포되는지, AP 브랜드가 어디에 붙는지를 계약 조건 논의의 중심에 둡니다. 유료 광고, 스폰서 콘텐츠, 플랫폼 제휴가 들어올 때 수익 수치만 보는 사람과, 그것이 독자와 자신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바꾸는지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 사이의 차이가 3년, 5년 뒤에 드러납니다.
지금 만들고 있는 콘텐츠 중 어떤 부분이 대체 가능한 생산물이고 어떤 부분이 자신만이 만들 수 있는 것인지 구분해 두는 작업도 있습니다. 콘텐츠 생산 비용이 낮아진 환경에서 대체 가능한 생산물의 가치는 더 빠르게 내려갑니다. AP통신이 가진 수십 년의 취재 아카이브, 현장 네트워크, 브랜드 신뢰가 AI로 복제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오랜 시간 동안 사람이 직접 현장에서 쌓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짧은 시간이지만, 1인 사업자도 자신만의 그 무언가를 가지고 있거나 지금 만들어가는 중일 것입니다.
저는 이 질문이 AI 도구를 쓰느냐 마느냐의 문제와는 다른 층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AP통신도 AI를 씁니다. 도구를 쓰는 사이에 자신이 가진 것 중 무엇을 소비하고 있는지, 무엇을 쌓고 있는지를 감지하고 있는가가 다른 질문입니다.
180년을 버텨온 기관이 AI 앞에서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기술 전략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지켜온 것 중 어떤 조건에서도 내놓지 않을 것이 무엇인가"였습니다. 그 답을 먼저 가진 사람이, 도구가 바뀌어도 자신이 만드는 것의 방향을 잃지 않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