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리스가 「린 스타트업」을 출간한 것은 2011년이었습니다. 그 책이 나온 뒤 15년간 MVP와 피벗이라는 단어가 창업 언어에 깊이 박혔고, 수백만 명이 그 책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2026년, 그가 다시 등장해 헤커뉴스에 직접 글을 올렸을 때 꺼낸 단어는 '혁신'도 '린'도 아니었습니다. '부패corruption'였습니다.
AMA에서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빅컴퍼니와 작은 스타트업, 비영리와 정부 기관을 오가며 수없이 같은 패턴을 목격했다고. 좋은 회사들이 자신의 미션에서 서서히 멀어지는 것을. 누군가 어느 날 나쁜 의도를 품어서가 아니라, 조직이 세워진 구조 자체가 천천히 그쪽으로 끌어당겼기 때문이라고. 그는 그 보이지 않는 힘을 '파이낸셜 그래비티financial gravity'라고 불렀습니다.
이 개념은 한국에서 회사를 키우거나 혼자 사업을 운영하는 사람에게 낯설지 않습니다. 처음의 원칙이 어느 순간 흐릿해지고, 처음 다짐했던 기준이 조용히 이동해 있는 경험. 이 글은 그 메커니즘을 들여다봅니다.
좋은 의도로 세운 회사가 자신을 배신하는 방식
에릭 리스의 새 책 「인코럽터블Incorruptible」의 핵심 관찰은 단순합니다. 기업이 미션에서 벗어나는 것은 나쁜 사람이 들어와서가 아니라, 재무 구조가 만들어내는 보이지 않는 압력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특정 누군가를 탓하기 어렵고, 공식적인 결정 하나로 설명하기도 어렵습니다. 수십 개의 작은 선택들이 쌓이면서 방향이 조금씩 바뀌어 있습니다.
그는 수십 년, 또는 수백 년을 살아온 조직들을 연구했습니다. 코스트코, 파타고니아, 노보 노르디스크가 그 안에 있었습니다. 이 회사들이 오래 버텨온 이유로 그는 제품의 우수성이나 탁월한 리더십만을 꼽지 않습니다. 의사결정 구조와 소유 형태, 보상 체계가 미션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처음부터 설계되어 있었다는 점을 더 중요하게 봅니다. 누가 어떤 권한을 갖는가, 무엇을 잘했을 때 보상이 오는가, 외부 자본이 어느 범위까지 영향력을 갖는가. 이것들이 조직의 실질적인 나침반이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잘 아는 스타트업 중 상당수는 성장 이후 "그 회사가 맞나?"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처음에는 고객 중심이라고 했지만 어느 순간 투자자 중심으로 이동합니다. 미션을 공개적으로 포기한 적도 없는데 의사결정의 기준이 조용히 바뀌어 있습니다. 리스는 이 이동이 개인의 도덕성 문제라기보다, 구조가 만들어내는 압력의 축적이라고 말합니다.
AMA에서 그는 자신이 앤트로픽의 거버넌스 작업을 도왔고, 제레미 하워드와 함께 AI 연구소 Answer.AI를 공동 창업했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장기 투자 문화를 위한 증권거래소 'Long-Term Stock Exchange'를 직접 설립했다고도 했습니다. 미션을 지키는 구조 설계가 이상론이 아니라 현재 진행 중인 실천 과제라는 맥락에서였습니다.
성장 과정에서 의사결정 권한은 조용히 희석됩니다
파이낸셜 그래비티가 까다로운 이유는, 막을 새도 없이 자연스러운 성장의 부산물처럼 찾아온다는 데 있습니다. 매출이 늘고 직원이 늘면 외부 자본이 들어오고, 이사회가 생기고, 분기 실적 보고가 시작됩니다. 이 중 어느 것도 나쁜 선택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창업자가 처음에 가졌던 의사결정 권한이 구조적으로 희석됩니다. 명시적인 약속 없이, 특별한 선언 없이.
한국에서도 비슷한 패턴이 반복됩니다. 소셜 임팩트를 앞세워 시작했던 스타트업이 시리즈 B 이후 마케팅 메시지를 바꿉니다. "커뮤니티를 위해"라고 했던 플랫폼이 "수익화를 위해"로 이동합니다. 그것이 배신이냐 성장이냐는 외부의 판단에 맡길 일이지만, 그 이동의 속도와 방향이 구조에 의해 이미 상당 부분 정해진다는 것이 리스의 핵심 관찰입니다.
이런 문제의식이 한국 실무 현장에서도 점점 더 자주 등장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조직이 커질수록 채용·평가·보상 체계가 단기 실적에 최적화되어 있는지, 아니면 장기 방향성을 강화하는 구조인지 점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탁월한 인재 관리가 단순히 좋은 사람을 뽑는 수준을 넘어, 조직이 어느 방향을 향하도록 설계되어 있는가의 문제라는 시각이 그것입니다. 채용 기준 하나, 승진 조건 하나가 조직의 미션과 정합하는지 살피는 일이 구조 설계의 출발점입니다.
이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시선
에릭 리스의 관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입장도 있습니다. 코스트코나 파타고니아를 모델로 삼는 것이 현실적이냐는 물음이 그중 하나입니다. 이 회사들은 강력한 창업자 비전과 외부 자본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소유 구조를 유지했습니다. 반면 한국의 대부분 스타트업은 외부 투자 없이 버티기 어렵고, 투자자 요구와 미션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일은 말로는 가능해도 실제 재무 압박 앞에서는 좁아집니다.
더 날카로운 반론은 이렇습니다. 파이낸셜 그래비티라는 개념이 구조를 지나치게 전면에 내세우면서 개인의 책임을 희석시킨다는 것입니다. 조직이 망가지는 데는 특정 리더의 반복적인 작은 타협, 문화의 방치, 구성원들의 침묵도 쌓입니다. 구조를 원인으로 지목하면 설명은 깔끔해지지만, 그것이 실천적으로 무엇을 바꾸는지는 여전히 불분명합니다. 리스 자신도 AMA에서 "이 모든 것을 다 알아냈다고 주장하지 않겠다"고 썼습니다. 구조 설계가 방향을 잡아줄 수 있지만, 개인의 일상적 의사결정을 대신하지는 못합니다.
저는 이 두 입장 모두 맞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구조는 방향을 설정하고, 개인은 그 안에서 선택합니다. 어느 쪽 하나가 전부를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작은 팀에도 이 압력은 이미 시작되어 있습니다
이 논의는 대기업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직원 3명짜리 팀에서도, 혼자 운영하는 사업에서도 훨씬 이른 단계에 시작됩니다. 외부 투자가 없어도 주요 거래처가 생기는 순간, 중요한 파트너십이 묶이는 순간,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처음의 기준을 조금씩 조정하게 됩니다.
처음에 "이 일은 절대 이렇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항목들을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그 중 몇 가지가 지금 일상이 되어 있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첫 번째 타협은 급박한 상황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두 번째도 그 다음 급박한 상황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 기준선이 이동해 있습니다. 이것이 부도덕한 선택들의 누적이 아니라, 구조가 만들어낸 자연스러운 이동이라는 게 에릭 리스의 진단입니다.
그가 제안하는 방어 수단 중 하나는 의사결정의 근거를 주기적으로 외재화하는 것입니다. 머릿속에만 있는 미션과 원칙을 문서로 꺼내 놓고, 누군가와 함께 정기적으로 점검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 규모가 작을수록 이런 장치는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창업자가 곧 회사이기 때문에 점검자가 없습니다.
몇 가지 질문을 제안합니다. 지난 6개월간 내가 바꾼 결정 중에서 수익이나 성장 때문이 아니라 관계 유지나 외부 압력 때문에 바꾼 것이 있습니까. 내 보상 체계 또는 수익 구조가 미션에 역행하는 행동을 유도하지는 않습니까. 주요 파트너나 고객이 내 사업의 방향성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습니까. 1년 전 기준선과 지금의 기준선 사이에 어떤 이동이 있었습니까.
이 질문들은 성과 관리나 직무 설계 못지않게 조직의 방향성을 실질적으로 결정합니다. 작은 팀에서도 어떤 사람을 뽑고, 어떤 기준으로 의사결정을 내리고, 어떤 수익 구조를 택하는가가 이미 거버넌스입니다.
에릭 리스가 15년 만에 '부패'라는 단어를 꺼낸 것은 스타트업 씬에 대한 경보가 아닙니다. 의도가 좋아도 구조가 방향을 정할 수 있고, 그 구조를 의식하는 일이 창업 초반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션을 지키는 것은 다짐의 횟수와 상관없이, 어떤 구조 안에서 의사결정을 내리는가에 크게 달려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