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 직원 한 명이 올해 초 받은 성과급은 기본급의 2964%였습니다. 1인당 평균 약 1억 5천만 원. 이 숫자만 보면 아무도 안 떠날 것 같습니다. 실제 자발적 이직률은 0.9%. 여기까지는 "돈을 많이 주니까 안 떠나지"라는 설명이 잘 맞아떨어집니다.
문제는 비슷한 수준으로 연봉을 주는 다른 대기업에서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직원들의 표현의 자유 지수와 심리적 안정감 지수가 같은 시기에 눈에 띄게 떨어지고 있습니다. 블라인드 데이터가 보여주는 흐름입니다. 돈은 비슷하게 주는데, 직원이 회사에서 느끼는 경험은 완전히 다릅니다.
이 간극에 이름이 붙었습니다. 5월 12일 코엑스에서 열린 원티드랩의 '하이브파이브 2026' 컨퍼런스에서 서울대 경영대학 신재용 교수가 "정서적 연봉emotional salary"이라는 개념을 꺼내 들었습니다. 지금 한국 HR 현장에서 가장 빠르게 퍼지고 있는 단어 중 하나입니다.
입사는 조건으로, 퇴사는 감정으로
정서적 연봉이란 업무 환경, 인간관계, 피드백의 질, 성장 기회, 자율성처럼 숫자로 표시되지 않는 직장 경험을 금전적 가치로 환산한 개념입니다. 신 교수는 회계학적 틀 안에서 이것을 측정 가능하게 다뤘습니다. 보이지 않는 가치를 정량화할 수 있다는 겁니다. 추상적으로 들리지만, 강연에서 그가 든 사례는 매우 구체적이었습니다.
SK하이닉스의 성과급 이야기는 2021년에 시작됩니다. 한 직원이 사내 메일로 보상 체계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김 열사'라는 별명이 붙은 그 메일 한 통이 결국 영업이익의 10%를 지급하는 합의로 이어졌고, 올해 초 2964%로 결실을 맺었습니다.
신 교수는 이 사건을 "통 큰 성과급의 효과"로 읽지 않았습니다. 직원 한 명의 목소리가 조직 전체의 보상 구조를 바꿨다는 사실 자체가, 그 조직에서 구성원이 자기 의견을 낼 수 있다는 신호였기 때문입니다. 성과급이 심리적 안정감을 만든 게 아니라, 심리적 안정감이 먼저 있었기에 그 메일이 쓰일 수 있었다는 해석입니다.
강연장을 메운 HR 담당자들 가슴에 가장 깊이 박혔다는 그의 한 문장은 이것이었습니다.
"결혼은 조건으로 결정하지만 이혼은 성격 차이로 하듯, 입사는 화폐 연봉으로 결정하지만 퇴사는 정서적 연봉의 결핍 때문이다."
화폐 연봉은 사람을 문 안으로 들어오게 만들지만, 오래 머무는지를 결정하는 건 완전히 다른 요소입니다.
최고의 실적이 최악의 심리를 만듭니다
높은 성과를 내는 조직일수록 내부에 "실패하면 안 된다"는 강박이 자리 잡기 쉽습니다. 그 강박이 의견을 꺼내기 전에 눈치를 살피게 만듭니다. 새로운 시도 앞에서 승인부터 구하게 만들고, 문제를 발견해도 보고하기 전에 "이걸 말했다가 어떻게 될까"를 계산하게 합니다. 겉으로는 잘 굴러가는 것처럼 보이면서 안에서는 서서히 굳어가는 조직. 흔한 패턴입니다.
신 교수가 짚은 지점도 이것이었습니다. 최고의 실적을 내면서도 "실패하면 안 된다"는 강박과 경직된 문화가 공존하는 조직은, 아무리 높은 화폐 연봉을 줘도 인재의 마음을 온전히 붙잡지 못합니다. SK하이닉스의 2964%는 결과였지 원인이 아닙니다.
지금은 표면적으로 '대잔류 시대'처럼 보입니다. 고용 시장이 얼어붙으면서 불만족스러운 자리를 버티는 사람이 늘었습니다. 신 교수는 이 상태를 직장인이 "젖은 낙엽처럼 회사에 붙어 있으려 노력하는" 상태라고 표현했습니다. 폭풍 전의 고요라는 진단입니다. 인구 구조가 이 고요를 오래 두지 않습니다.
2026년부터 청년 인구가 급감하기 시작해 2035년에는 정점 대비 15% 이상 줄어든다는 전망이 있습니다. 일부 대학원 현장에서는 교수가 학생을 선택하던 방향이 이미 역전됐습니다. 지금 일본에서 벌어지는 구인난이 한국의 현실이 되는 날, 우수한 이공계 R&D 인력들은 여러 회사를 저울질하며 '쇼핑'하게 됩니다. 그때가 되면 정서적 연봉이 낮은 조직은 화폐 연봉을 아무리 올려봐야 늦습니다.
인사관리 연구자들이 오랫동안 강조해온 것이 있습니다. 조직의 지속 가능성을 진단할 때 공식적인 보상 체계 못지않게 비공식적 심리 계약이 얼마나 촘촘한지를 살펴야 한다는 점입니다. 직원이 "내 목소리가 이 조직에서 반영된다"고 느끼는 경험이 누적될수록 이직을 고려하는 역치가 높아집니다. 그 역치가 정서적 연봉의 실질 가치입니다. 수년에 걸쳐 쌓이는 자산이지, 연말 보너스 한 번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잔류의 이유는 이미 지금 만들어집니다
이 이야기가 대기업에만 해당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서적 연봉의 논리는 조직 규모와 무관하게 작동합니다. 협업자 한 명과 일하는 1인 사업자도, 소규모 팀을 운영하는 디렉터도, 외주 인력을 반복적으로 쓰는 기획자도 이 프레임 안에서 자기 조직을 점검할 수 있습니다.
가장 직접적인 점검 지점은 피드백의 방향입니다. 함께 일하는 사람이 내 피드백을 받을 때 방어적이 되는지, 다음 시도로 넘어가는지를 관찰해 보면 됩니다. 방어적이 된다면 그 피드백이 어떻게 전달되고 있는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실수가 생겼을 때 원인을 먼저 묻는지, 결과를 먼저 따지는지도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보고의 방향도 신호입니다. 상대가 먼저 문제를 들고 오는 구조인지, 내가 먼저 발견해야만 드러나는 구조인지. 후자라면 상대는 이미 "이걸 말했다가 어떻게 될까"를 계산하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 계산이 반복되면 정서적 연봉은 조용히 깎입니다.
프로젝트가 끝난 뒤의 회고도 핵심입니다. 잘 됐을 때만 회고하는 구조와, 기대에 못 미쳤을 때도 원인을 함께 들여다보는 구조는 장기적으로 전혀 다른 신뢰 자산을 쌓습니다. 아이디어가 채택되지 않았을 때 다음 번에도 제안이 이어지는지, "알아서 해도 돼"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모든 결정에 개입하지 않는지도 같은 맥락입니다. 자율성은 선언이 아니라 행동에서 확인됩니다.
정서적 연봉은 일회성 이벤트로 쌓이지 않습니다. 분기에 한 번 칭찬하거나, 연말에 감사 인사를 건네는 방식으로는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피드백을 줄 때마다, 방향을 정할 때마다, 상대가 "이 사람과 일하는 게 가치 있다"고 느끼는 일상적인 상호작용의 축적이 본체입니다. 그 축적이 9년 후 채용 시장이 뒤집혔을 때 화폐 연봉으로 살 수 없는 자산이 됩니다.
2035년까지 남은 9년 동안 지금 함께 일하는 사람이 "이 조직에서 나의 실패도 다음 시도의 재료가 된다"고 반복해서 느끼게 하는 것. 그것이 인구 절벽이 현실이 됐을 때 돈으로는 빠르게 메울 수 없는 격차의 원천입니다.
화폐 연봉은 사람을 들어오게 만들고, 정서적 연봉은 사람을 남아 있게 만듭니다. 남아 있는 사람이 결국 조직의 미래를 만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