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초, 한 웹툰 작가가 SNS에 짧은 글을 남겼습니다. 6년 동안 매주 연재를 이어온 작품이 플랫폼 알고리즘 개편 한 번에 월 수입이 70% 가까이 사라졌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림체는 변함없이 좋았고, 독자 평점도 유지됐습니다. 달라진 것은 플랫폼이 그 작가의 팬을 더 이상 그 작가에게 연결해주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점뿐이었습니다.
품질은 오랫동안 생존의 조건이었습니다. 다른 경쟁자보다 잘 만들면, 적어도 시장에 머물 수 있다는 기대가 가능했습니다. 생성형 AI가 콘텐츠 제작의 장벽을 낮추면서 그 기대의 유효기간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습니다.
완성도가 공짜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생성형 AI가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은 2023년 이후, 콘텐츠 시장에 눈에 띄는 변화가 생겼습니다. 이미지 생성, 영상 편집, 카피라이팅처럼 예전에는 숙련된 제작자만 다룰 수 있던 작업을 누구나 빠르게 처리할 수 있게 됐습니다. Adobe Firefly는 출시 1년 만에 120억 장 이상의 이미지를 생성했는데, 그 상당 부분이 전문 디자이너가 아닌 일반 사용자에게서 나왔습니다.
공급이 늘어나면 단가가 내려갑니다. 스톡이미지 플랫폼들의 최근 실적에서 이 패턴이 뚜렷하게 보입니다. AI 생성 이미지 제출 건수는 수백 퍼센트 증가했지만, 개당 수익은 같은 기간 크게 줄었습니다. 단가 하락은 품질 저하와 무관했습니다. 공급 물량이 급증하면서 완성도 하나만으로는 가격을 지탱하기 어려워진 현상이었습니다.
이 흐름은 영상, 음악, 텍스트 분야에서도 동시에 전개됩니다. 유튜브에는 매 분마다 500시간 분량의 영상이 업로드됩니다. 이 공간에서 살아남는 채널은 대부분 '잘 만든 영상을 올리는 곳'이 아니라 '보러 오는 이유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국내외 업계 관찰자들은 콘텐츠 산업의 경쟁 축이 '제작 완성도'에서 '생태계 소유'로 옮겨가고 있다고 분석합니다. 팬덤, 데이터, 커뮤니티, 플랫폼 — 이 중 하나라도 직접 소유한 사람이 협상력을 유지한다는 시각입니다.
팬을 소유하는 것과 플랫폼에 빌려두는 것
문제는 대부분의 콘텐츠 창작자가 팬을 '소유'하지 못하고 플랫폼에 '임대'해두고 있다는 점입니다. 인스타그램 팔로워 5만 명은 인스타그램이 당신에게 임시로 접속권을 허용해준 사람들입니다. 플랫폼이 알고리즘을 바꾸거나, 정책을 변경하거나, 어느 날 서비스를 종료한다면, 그 5만 명 중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당신을 직접 찾아올 수 있는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넷플릭스는 이 구조를 누구보다 잘 압니다. 2024년 기준 넷플릭스의 월간 활성 이용자는 3억 명을 넘겼습니다. 그러나 이 3억 명은 넷플릭스의 고객이지, 특정 감독이나 작가의 팬이 아닙니다. 스타 PD가 다른 플랫폼으로 이적해도 이용자 대부분은 그 PD를 따라가지 않습니다. 팬이 창작자가 아니라 플랫폼에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팬덤을 직접 소유한 사례는 다른 그림을 보여줍니다. 테일러 스위프트는 2023년 Eras Tour에서 플랫폼에 기대지 않는 직접 소통 채널을 중심으로 공연 티켓을 배분했고, 1조 원이 넘는 부가 경제를 스스로 설계했습니다. 같은 해 스타벅스가 리워드 프로그램을 통해 확보한 미국 내 활성 회원 수는 3,300만 명이었습니다. 스타벅스 음료가 세계에서 가장 완성도 높은 커피가 아님에도, 이 회원 데이터는 어떤 카페도 단기간에 복제할 수 없는 자산입니다.
1인 사업자에게 생태계 설계는 아직 구호에 가깝습니다
이 시점에서 한 가지 반론을 솔직하게 짚어야 합니다. "생태계를 설계해야 한다"는 말은 1인 창작자나 소규모 사업자에게 현실적인 조언이 되기 어렵습니다. 뉴스레터를 운영하고, 유료 커뮤니티를 유지하고, 독자 데이터를 분석하려면 시간과 비용, 그리고 지속적인 실행력이 뒤따릅니다. 콘텐츠를 만들면서 동시에 생태계를 설계하라는 요구는 1인 운영자에게 사실상 두 사람 분의 역할을 맡기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수치도 이 어려움을 뒷받침합니다. 뉴스레터 플랫폼 Substack에서 월 $500 이상의 유료 구독 수익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발행인 비율은 전체의 5% 미만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메일 리스트를 시작하다가 유지 비용과 시간에 지쳐 포기합니다. '소유형 채널'의 가치를 알면서도 운영을 이어가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이 반론은 충분히 유효합니다. 그러나 생태계 구축이 어렵다는 사실이 그것을 후순위로 미뤄도 된다는 근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대부분의 1인 사업자가 생태계 구축을 뒤로 미루는 이유 중 하나는 '지금 당장은 콘텐츠 품질로 버틸 수 있다'는 기대입니다. 생성형 AI가 그 기대를 얼마나 빠르게 갉아먹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이 글의 출발점입니다.
지금 쌓고 있는 것이 자산인지 임대인지
팬덤과 데이터, 커뮤니티를 직접 소유하는 것이 중요해졌다면, 1인 사업자와 콘텐츠 디렉터는 지금 자신의 상황을 어떻게 진단할 수 있을까요.
한 방법은 제품이나 서비스의 겉모습이 아니라 그것이 남기는 관계의 깊이를 보는 것입니다. 마케팅과 디자인 분야에서 오랜 실무 경험을 쌓아온 전문가들은 소비자가 제품 자체보다 그 제품이 만들어주는 경험과 소속감에 반응한다는 점을 반복해서 관찰합니다. 물건을 구매하는 행위가 단순한 소유를 넘어, 그 브랜드가 표현하는 세계관에 참여하는 행위에 가깝다는 시각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콘텐츠 완성도는 사람들을 처음 불러오는 역할을 하고, 생태계는 그들이 머물게 만드는 구조를 담당합니다.
실천 가능한 자기 점검은 간단한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내 독자·구독자와 내가 직접 연결되는 채널이 있는지부터 확인합니다. 이메일 리스트, 카카오채널, 텔레그램 그룹처럼 플랫폼의 알고리즘을 거치지 않고 직접 소통할 수 있는 경로입니다. SNS 팔로워 숫자는 이 질문과 무관합니다.
그다음은 내가 오늘 활동을 멈춘다면 3개월 후에도 내 이름을 검색하는 사람이 있는지를 생각해봅니다. 꾸준히 쌓인 콘텐츠 자산과 커뮤니티 인지도가 있다면, 플랫폼이 사라져도 '찾아오는 사람'이 생깁니다. 그때 비로소 팬과의 관계가 임대에서 소유로 옮겨가기 시작합니다.
내가 만드는 콘텐츠가 데이터를 쌓고 있는지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주제가 반응을 받는지, 어느 시간대에 어떤 형식이 읽히는지를 추적할 수 있다면, 콘텐츠 제작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정밀해집니다. 반응 데이터 없이 완성도만 높이는 것은 피드백 없이 같은 방향을 계속 고집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 대형 플랫폼을 직접 구축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메일 리스트 200명이라도 내가 직접 관리할 수 있다면, 그것은 플랫폼에 기댄 팔로워 2만 명보다 안정적인 자산일 수 있습니다. 작게 시작하되, 플랫폼에 의존하지 않는 연결을 한 가지라도 갖추는 것이 출발점입니다.
콘텐츠를 잘 만드는 능력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다만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보장받지 못하는 시장에서, 지금 내가 쌓고 있는 것이 '작품'인지 '관계'인지를 한 번쯤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