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하반기, 식자재마트 디지털 전환 솔루션을 공급하던 한 스타트업이 서비스를 종료했습니다. 대표가 사퇴했고, 솔루션을 쓰던 업체들은 갑자기 시스템 접근이 막히거나 운영 데이터를 회수하는 과정에서 혼란을 겪었습니다. 이 회사의 피치덱에는 2023년 대비 2024년 매출 237% 성장, 2024년 대비 2025년 166% 성장이 적혀 있었습니다. 나중에 부정 회계 이슈가 드러났습니다.

계약을 맺기 직전, 그 피치덱을 처음 받은 담당자 입장에서 저 숫자는 신뢰를 주는 인상입니다. 3년 차 스타트업이 2년 연속 세 자릿수 성장을 기록했다는 것은, 확인하지 않으면 성장하는 회사라는 판단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그 판단이 어긋나지 않으려면 거쳐야 할 확인 순서가 있습니다.

237%는 무엇을 잰 숫자인가

B2B 플랫폼 업체가 제시하는 '매출' 수치는 같은 표현이라도 측정 대상이 다를 수 있습니다.

플랫폼 위에서 거래가 이뤄지는 방식으로 운영하는 경우, 거래총액(GMV)과 실제 인식매출은 다릅니다. GMV는 플랫폼에서 처리된 전체 거래 금액이고, 인식매출은 그 중 수수료나 구독료 형태로 회사에 귀속된 금액입니다. GMV가 100억 원이고 수수료율이 3%라면 인식매출은 3억 원입니다. 피치덱에 '매출 237% 성장'이라고 적혔을 때 그 기준이 어느 쪽인지에 따라, 회사의 실제 수익 규모 판단이 달라집니다.

비교 기준점도 확인합니다. 창업 초기 매출이 낮은 해를 기준으로 잡으면 절대 규모가 작더라도 높은 성장률이 나옵니다. 2023년 매출이 5천만 원이었다면 2024년에 1억 7천만 원이 돼도 수치상으로는 240%에 가깝습니다. 그 해석은 분모를 봐야 달라집니다.

매출을 언제 기록하느냐도 따집니다. 1년치 계약을 계약 시점에 한꺼번에 매출로 잡는 방식이면, 같은 금액이라도 월별로 나눠 인식하는 방식보다 특정 시점의 성장률이 크게 보입니다. 연도 말에 계약 실적을 집중시키는 방식으로 성장률을 높이면, 다음 해 초에 이탈률이 함께 올라가는 패턴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장률과 함께 다음 해 초 이탈률을 보는 것이 더 정확한 그림을 줍니다.

그 성장이 몇 개 계정에서 비롯됐는가

고객 집중도는 B2B 벤더의 안정성을 평가할 때 성장률만큼 봐야 하는 수치입니다.

상위 3개 고객사가 전체 매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경우, 그 중 한 곳이 계약을 해지하거나 결제를 미루는 것만으로 회사 전체 현금흐름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성장률이 높더라도 고객 기반이 소수에 집중돼 있다면, 그 수치가 얼마나 지속되는지를 별도로 봐야 합니다. 기존 대형 고객이 계약 규모를 늘리거나 단가를 높여준 방식으로 만들어진 성장은, 신규 수요를 넓힌 것과 성격이 다릅니다.

피치덱에는 총 계약 건수와 전체 성장률이 강조되지만, 상위 고객 비중이나 고객 이탈률은 요청하지 않으면 나오지 않습니다. 계약 전 단계에서 이 정보를 얻으려면 직접 물어야 합니다.

"지난 12개월 동안 계약을 갱신하지 않은 고객이 몇 곳입니까?" "상위 5개 고객이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모호하거나 사업 기밀이라는 이유로 공유를 거부한다면, 그 자체가 판단 재료입니다. 상장 고객사가 있다면, 그 고객사의 공시 자료에서 공급업체 의존도를 확인할 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외부감사 보고서가 있는지 먼저 확인합니다

외부감사와 인증서는 다른 것입니다.

외부감사는 독립된 감사법인이 재무제표를 검토해 의견을 표명하는 절차입니다. ISO 인증이나 정보보호 인증은 보안이나 품질 기준 충족 여부를 확인하는 것으로, 재무 수치의 정확성을 보증하지는 않습니다. 벤더가 내세우는 인증 목록과 재무 검증은 별개 사안입니다.

국내 비상장기업 중 외부감사 의무 대상은 직전 사업연도 자산총액 120억 원 이상, 또는 매출액 100억 원 이상 등 일정 요건을 충족하는 경우입니다(주식회사 등의 외부감사에 관한 법률 기준). 이 기준 이하의 스타트업이라면 외부감사 없이 내부에서 산출한 수치를 그대로 피치덱에 쓸 수 있습니다. '매출 237% 성장'이라는 숫자가 독립된 감사법인의 검토를 거친 것인지, 회사 내부에서 집계한 것인지를 물어보지 않으면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이 수치는 외부감사를 받은 재무제표를 기준으로 합니까?" "감사보고서를 보여주실 수 있습니까?" 이 두 가지 질문이 실사의 출발점입니다.

미국 상장기업이 매년 제출하는 연간 공시 보고서(10-K)에는 이 구분이 명시적으로 담겨 있습니다. 독립감사인의 의견, 매출 인식 기준, 경영진의 내부통제 평가 결과가 항목별로 나뉘어 있어서, 이 구조에 익숙해진 사람은 비상장 벤더의 피치덱을 볼 때도 같은 질문을 자연스럽게 떠올립니다. 이 수치를 누가 검증했고, 어떤 방식으로 인식됐으며, 예외 처리는 어디에 있는가.

계약서에 명시해야 할 데이터 회수 조건

서비스가 정상 운영되는 동안에는 이 조항의 필요성을 체감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벤더가 갑자기 서비스를 종료하거나 경영 위기로 운영이 불안정해질 때, 계약서에 데이터 회수 조항이 어떻게 써 있느냐가 실질적 차이를 만듭니다.

계약서에서 먼저 볼 것은 데이터 이관 형식입니다. 언제든지 CSV나 범용 포맷으로 내보낼 수 있는지, 아니면 벤더 고유 포맷으로만 저장되는 방식인지에 따라 이관의 용이성이 달라집니다. 서비스 종료 통보 이후 데이터 접근이 보장되는 기간도 계약서에 명시돼 있는지 확인합니다. 통보만 있고 접근 기간이 특정돼 있지 않으면, 종료 직후 시스템이 내려가더라도 계약으로 막을 근거가 없습니다. 서비스 종료 이후 서버에 남은 데이터를 누가 얼마 동안 보유하고 어떻게 처리하는지도 명시 여부를 확인합니다. 이 세 가지가 계약서에 없으면, 이후 협의는 계약 바깥의 교섭으로만 해결해야 합니다.

벤더가 빠르게 성장하는 시기에는 도입 실적이 필요한 쪽이 벤더이기 때문에, 계약 조건 협상에서 고객사 입장이 상대적으로 유리합니다. 경영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그 여지는 줄어듭니다. 성장 수치를 검토하는 시점과 이 조항을 협상하는 시점은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