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의 가격 모델 격변
내가 만든 SaaS 제품, 어떻게 가격을 매길 것인가. 한 달에 얼마짜리 구독으로 갈 것인가, 사용량만큼 받을 것인가, 무료로 풀고 일정 시점부터 유료화할 것인가. 이 질문은 단순한 가격 결정이 아니라, 제품의 사업 구조 전체를 결정하는 선택입니다.
문제는 지금이 SaaS 가격 모델의 격변기라는 점입니다. AI가 들어오면서 좌석(seat) 기반 구독이라는 SaaS의 황금 공식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데이비드 조지(a16z)의 진단처럼, 고객이 AI 도입으로 가장 먼저 줄이려는 비용은 인건비입니다. 좌석 기반 과금이 바로 그 타깃이 됩니다.
소프트웨어 모네타이제이션 플랫폼 Schematic이 2026년 2월에 정리한 9가지 모델을 한국 창업자 관점에서 재구성합니다. 자기 제품에 어느 조합이 맞는지 판단하는 기준이 됩니다.
9가지 가격 모델 개관
SaaS 요금 모델 9가지
각 모델을 자세히 보면 어디에 어떤 게 맞는지 보입니다.
1. 정액 구독: 가장 단순하지만 성장이 멈춥니다
월 29만 9천 원 무제한 사용. 가장 단순한 모델입니다. 영업하기 쉽고, 고객이 이해하기 쉽고, 매출 예측이 쉽습니다.
문제는 사용량이 늘어도 매출이 안 늡니다. 가벼운 사용자와 헤비 유저가 같은 돈을 냅니다. 헤비 유저 입장에서는 이득이지만, 회사 입장에서는 가장 가치를 많이 끌어내는 고객으로부터 추가 매출을 만들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회사가 정액 구독을 베이스로 깔되, 사용량이나 애드온을 얹어서 확장합니다. 정액 구독 단독으로 가는 경우는 점점 줄어듭니다.
2. 좌석 기반: SaaS의 황금 공식, 그러나 위기
지난 15년간 SaaS의 표준이었습니다. 한 사용자당 월 25달러. 사용자가 늘면 매출이 늡니다. 사용자가 줄면 매출도 줍니다. 단순하고 예측 가능합니다.
협업 도구(슬랙, 노션), 디자인 도구(피그마), CRM(세일즈포스) 모두 좌석 기반으로 컸습니다.
하지만 AI 시대에 이 모델이 정면으로 도전받고 있습니다. 데이비드 조지의 표현이 정확합니다. "고객이 AI 도입으로 가장 먼저 줄이려는 비용은 인건비입니다. 좌석 기반 과금이 바로 그 타깃이 됩니다."
직원 100명이 쓰던 도구를, AI 에이전트로 직원 50명이 같은 일을 하게 되면 좌석 수가 절반으로 줄어듭니다. 같은 고객인데 매출이 반토막 나는 겁니다. 좌석 기반에만 의존하는 SaaS는 AI 시대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3. 사용량 기반: AI 시대의 표준이 될 가능성
API 호출 수, 처리한 이벤트 수, 컴퓨팅 시간, 데이터 양. 고객이 실제로 쓴 만큼만 받습니다.
AWS, Twilio, Stripe가 이 모델로 거대한 사업을 만들었습니다. 사용자가 늘든 줄든, 활동량이 늘면 매출이 늘어납니다. AI 에이전트가 좌석 수를 줄여도, 그 에이전트가 만들어내는 API 호출은 늘어납니다. AI 시대에 자연스럽게 적합합니다.
다만 단점도 분명합니다. 고객 입장에서 매달 청구서가 예측 불가능합니다. "이번 달에 얼마 나올까?"라는 불안이 채택을 막습니다. 그래서 사용량 기반은 보통 베이스라인 + 초과분 사용량 형태로 설계됩니다.
4. 크레딧 기반: AI 제품에 가장 적합한 모델
AI 제품에서 빠르게 표준이 되어가는 모델입니다.
미리 크레딧을 사고, 작업을 할 때마다 크레딧을 차감합니다. 가벼운 작업은 적게 차감하고, 무거운 작업은 많이 차감합니다. ChatGPT의 메시지 크레딧, 미드저니의 GPU 시간, 클로드 API의 토큰. 모두 같은 구조입니다.
왜 AI에 크레딧이 적합한가. 작업마다 비용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텍스트 요청과 영상 생성은 비용이 100배 차이 날 수 있습니다. 사용량 기반으로 받으면 청구서가 너무 변동성이 큽니다. 크레딧 기반이면 "5만 크레딧 = 월 5만 원"으로 예측 가능하면서도, 작업별 실제 비용에 비례한 차감이 가능합니다.
한국에서도 AI 기반 SaaS를 만든다면 크레딧 모델을 우선 검토할 만합니다. 사용자가 자기 사용량을 통제할 수 있고, 회사도 변동성 있는 인프라 비용을 관리할 수 있습니다.
5. 티어 플랜: 가장 익숙한 패키징
스타터, 프로, 엔터프라이즈. 세 단계 패키지가 표준입니다.
가장 낮은 티어는 기존 매출을 보호합니다. 중간 티어는 확장을 흡수합니다. 최상위 티어는 협상과 커스텀 조건을 위한 공간입니다.
세 단계가 표준이 된 이유가 있습니다. 고객이 한눈에 비교할 수 있고, 영업 사원이 설명하기 좋고, 가격 차이가 명확합니다. 티어 4개 이상은 오히려 선택 마비를 유발합니다.
다만 이 모델만 단독으로 쓰는 경우는 드뭅니다. 보통 티어 + 사용량 한도 + 애드온의 조합으로 설계됩니다.
6. 애드온: 핵심 제품을 가볍게 유지하는 법
감사 로그, 고급 권한 관리, 프리미엄 통합, 높은 API 한도. 모든 고객이 필요한 기능이 아닌 것들입니다.
애드온으로 분리하면 핵심 제품이 가벼워집니다. 가격도 단순해집니다. "기본은 월 29달러, 감사 로그가 필요하면 +10달러." 고객이 필요한 만큼만 사고, 회사는 부가 매출을 만듭니다.
애드온의 진짜 가치는 신규 기능 출시의 부담을 줄이는 데 있습니다. 새 기능을 만들 때마다 가격 구조 전체를 다시 짜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새 애드온으로 추가하면 됩니다.
7. 프리미엄: 가장 강력하지만 가장 위험한 모델
무료로 시작하고, 일정 한도를 넘으면 유료로 전환합니다. 노션, 슬랙, 드롭박스가 이 모델로 성장했습니다.
장점은 명확합니다. 진입 장벽이 0입니다. 입소문으로 퍼집니다. 사용자가 제품에 익숙해진 다음에 유료 전환을 권유합니다.
단점도 명확합니다. 한도 설정이 잘못되면 무료 사용자만 늘고 매출은 안 늡니다. 인프라 비용은 무료 사용자 때문에 늘어나는데 매출 전환이 안 되면 적자가 쌓입니다.
핵심은 한도를 어디에 설정하느냐입니다. 너무 빡빡하면 사용자가 오기 전에 떠납니다. 너무 느슨하면 영원히 무료로 씁니다. 사용자가 제품의 진짜 가치를 느낀 직후 유료 전환을 자연스럽게 유도하는 지점, 그게 프리미엄 설계의 핵심입니다.
8. 마켓플레이스 수수료: 플랫폼 비즈니스의 표준
거래가 발생할 때 수수료를 받는 모델입니다. 우버, 에어비앤비, 쿠팡 같은 플랫폼이 이 구조입니다.
거래당 15%, 또는 정액 수수료, 또는 유료 등록비. 사용자에게 구독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거래 활동이 늘어날수록 매출이 따라옵니다.
SaaS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마켓플레이스는 양면 시장(투사이드)을 만들어야 합니다. 공급자와 수요자 둘 다 모아야 작동합니다. SaaS보다 초기 구축이 훨씬 어렵고, 임계 질량(critical mass)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매출이 거의 없을 수 있습니다.
9. 성과 기반: AI 시대의 새로운 가능성
가장 흥미롭지만 가장 어려운 모델입니다. 접근권을 파는 게 아니라 결과를 팝니다.
AI 영업 도구가 "확보한 리드 1건당 5만 원"을 받습니다. AI 사기 탐지 도구가 "차단한 사기 거래 1건당 수수료"를 받습니다. AI 고객 응대 봇이 "해결한 문의 1건당" 청구합니다.
고객 입장에서 가장 매력적인 모델입니다. 결과가 안 나오면 안 내도 됩니다. 회사 입장에서는 자기 제품의 가치를 가장 직접적으로 매출에 연결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측정입니다. "결과"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그 결과가 우리 제품 때문에 일어났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측정이 부정확하거나 분쟁이 생기면 모델 전체가 무너집니다.
AI 자동화 제품이 늘어나면서 이 모델이 점점 늘어날 가능성이 큽니다. AI는 명확한 결과(처리한 건수, 절감한 시간)를 측정하기 좋은 영역에서 일하기 때문입니다.
하이브리드 모델의 등장
위의 9가지 중 하나만 골라서 쓰는 회사는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2~3개를 조합합니다.
가장 흔한 조합 패턴이 있습니다.
구독 + 사용량 초과분. 베이스 플랜 안에서는 사용량 한도까지 무제한, 한도 초과 시 사용량당 과금. 클로드, ChatGPT 엔터프라이즈가 이 구조입니다. 예측 가능성과 확장성을 동시에 잡습니다.
구독 + 크레딧. 정액 구독으로 기본 기능을 제공하고, AI 작업은 크레딧으로 차감. AI를 곁들인 SaaS에서 점점 흔해지는 패턴입니다.
티어 + 애드온. 세 단계 티어를 깔고, 각 티어에 추가 기능을 애드온으로 판매. 표준 B2B SaaS의 형태입니다.
셀프서브 + 영업 협상. 작은 고객은 신용카드로 셀프 가입, 큰 고객은 영업팀 협상으로 커스텀 계약. 같은 제품을 두 가지 다른 채널로 판매합니다.
핵심은 구독으로 예측 가능한 매출을 만들고, 사용량/크레딧으로 확장 매출을 잡는 구조입니다. 둘 다 필요합니다.
모델 선택 기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당신의 제품을 고객이 어떻게 쓰는가"에 있습니다. 세 가지 패턴을 보세요.
고객 사용이 안정적이면 구독 또는 좌석 기반. 사용자가 매일 비슷하게 쓰는 도구. 이메일 클라이언트, CRM, 협업 도구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고객 사용이 변동적이면 사용량 또는 크레딧 기반. 한 달에 100번 쓸 수도 있고 10,000번 쓸 수도 있는 도구. AI API, 인프라 도구, 데이터 처리 도구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고객마다 사용 양상이 크게 다르면 티어 + 애드온. 작은 팀과 큰 기업이 같은 제품을 다른 방식으로 쓰는 경우. 대부분의 B2B SaaS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가격 모델 재설계의 필요성
지금까지 SaaS의 가격 결정은 한 번 정하면 오래 가는 결정이었습니다. 한 번 좌석 기반으로 정하면 5년 동안 그대로 갔습니다.
AI 시대에는 다릅니다. 좌석이 줄어듭니다. AI가 만들어내는 부하는 사용자 수와 비례하지 않습니다. 자동화가 결과를 만들어내는 방식이 인간 노동과 다릅니다. 기존 가격 모델의 가정이 깨지고 있습니다.
데이비드 조지의 진단을 다시 인용하면, 두 가지 길이 있다고 했습니다. AI 네이티브 제품으로 매출 성장률을 끌어올리거나, 비용 구조를 재설계해 영업이익률을 끌어올리거나. 두 길 모두에서 가격 모델의 재설계가 핵심입니다.
지금 SaaS를 운영하고 있다면, 자기 가격 모델이 AI 시대에도 작동하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좌석 기반에만 의존하고 있다면 사용량이나 크레딧을 더해야 합니다. 정액 구독만으로 가고 있다면 헤비 유저로부터 추가 가치를 잡을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한 모델로 충분했던 시대가 끝나고, 하이브리드 설계가 표준이 되는 시대가 왔습니다.
새로 SaaS를 시작한다면, 처음부터 하이브리드를 가정하고 설계하는 게 좋습니다. 베이스라인은 구독으로, 확장은 사용량이나 크레딧으로. 이 두 축을 동시에 가지고 시작하면 시장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습니다.
가격은 단지 숫자가 아닙니다. 제품이 만들어내는 가치를 어떻게 매출로 전환할지에 대한 사업 모델 자체입니다. AI 시대에 그 모델을 다시 짜고 있는 회사가 다음 5년의 승자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