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영국 미스 잉글랜드 대회에 이전에 없던 순서가 하나 추가됐습니다. 참가자들이 자신의 AI 아바타를 선보이는 라운드였습니다. 우승자인 23세 제시카 플리스킨은 '제사Jessa​'라는 이름의 AI 분신을 내세웠습니다. 제사는 150개 언어로 발표를 할 수 있었습니다. 플리스킨 본인이 영어 하나로 경쟁하는 동안, 그녀의 분신은 세계 전체를 향해 동시에 말하고 있었습니다.

이 장면이 흥미로운 이유는 기술이 인상적이어서만은 아닙니다. 이 장면은 앞으로 5년 안에 대부분의 직업인에게 찾아올 질문을 먼저 꺼냈기 때문입니다. 분신이 나 대신 일한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리고 그때 나의 몸값은 어디서 결정될까요.

전 세계 소비자 10명 중 7명이 선택한 단어

2025년 12월, 글로벌 광고그룹 덴츠dentsu​가 전 세계 소비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제목은 '리인벤션의 어머니들Consumer Vision: Mothers of Reinvention​'이었습니다. 보고서가 내놓은 수치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조사 대상의 70%가 AI를 '나를 대체하는 존재'가 아닌 '나를 몇 배로 키워주는 증폭기'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고 답했습니다.

단지 인식만 바뀐 것이 아닙니다. 영국 런던정경대(LSE) 연구에 따르면 AI는 이미 직장인의 업무 시간을 주당 최대 7.5시간 줄여 주고 있습니다. 주 5일 기준으로 거의 하루치 근무 시간에 가까운 분량입니다. 응답자의 85%는 앞으로 AI가 새로운 것을 배우는 데 드는 시간을 크게 단축해 줄 것이라 내다봤고, 73%는 AI가 기억력 저하나 언어 장벽, 학습 어려움 같은 제약을 극복하도록 도울 것이라 응답했습니다.

보고서는 이 변화를 '인간 곱하기 AI(human × AI)'라는 표현으로 정리합니다. AI를 쓰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의 격차가, 다른 두 사람 사이의 격차보다 훨씬 빠르게 벌어지는 구조를 말합니다. AI에게 일을 떠넘기는 것이 아니라, AI와 한 몸처럼 움직여 자신의 능력을 배수로 늘리는 상태입니다.

디지털 분신 시장의 규모 전망은 이 흐름을 숫자로 확인해 줍니다. 2025년부터 2032년까지 연평균 47.6% 성장해 약 900조 원 규모에 이를 것으로 추산됩니다. 제시카 플리스킨의 사례는 특수한 이벤트가 아니라 앞으로 일상적인 업무 장면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보고서는 AI 분신이 취업 시장에서 나를 대신해 경쟁하는 도구로까지 쓰일 것이라는 전망도 담고 있습니다. 소비자의 77%는 5년 안에 세계 최고 전문가의 AI 클론과 대화하며 전문 지식을 습득하게 될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AI가 더 많이 할수록 왜 사람 비용은 오르는가

여기서 역설이 생깁니다. AI가 더 많은 업무를 처리할수록 인력 수요가 줄어야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실제 시장은 반대 방향을 가리킵니다.

그 이유는 비워진 자리에 있습니다. AI가 절약해 준 7.5시간은 저절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시간은 더 복잡한 판단, 더 많은 이해관계자와의 조율, 반복이 어려운 창의적 작업으로 채워집니다. 단순한 업무가 사라진 자리에 단순하지 않은 일들이 남습니다. 그 일들을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의 수요가 높아집니다.

AI를 다루는 역량이 하나의 기술로 자리 잡을수록, 그 역량을 가진 사람의 희소성도 따라서 높아집니다. 채용 현장에서 이미 나타나는 변화가 있습니다. 어떤 업무를 직접 처리하는 능력보다, 그 업무를 AI와 함께 더 빠르고 정확하게 끌어올리는 능력이 더 중요한 평가 기준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일부 채용 공고에는 AI 도구 활용 능력이 이미 필수 자격 항목으로 올라와 있습니다. 사람을 뽑는 기준이 바뀌면, 그 기준을 충족하는 사람의 몸값도 바뀝니다.

낙관론의 빈틈을 정직하게 보면

그러나 이 전망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전에 점검이 필요합니다.

덴츠 보고서의 70%라는 수치는 전 세계 소비자 조사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70%가 실제로 AI를 업무에 활용하고 있는 사람들인지, 아니면 '그럴 것 같다'는 기대를 답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기대와 현실 사이에는 항상 거리가 있습니다.

LSE의 주당 7.5시간 절약이라는 수치도 모든 직군에 균일하게 적용되지 않습니다. 문서 작성, 번역, 요약, 데이터 정리 같은 정형화된 업무에서는 효과가 크지만, 현장 중심 서비스나 대면 커뮤니케이션이 핵심인 직군에서는 그 효과가 제한적입니다. 이 혜택이 모든 직업인에게 고르게 작동하는 구조가 아닌 것입니다.

디지털 분신에 대한 의문도 짚어야 합니다. 150개 언어로 발표할 수 있다는 것은 기술적으로 유효합니다. 하지만 거래처나 고객이 분신과 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신뢰 관계가 어떻게 달라지는지는 아직 검증이 부족합니다. 분신이 잘못된 판단을 내렸을 때 책임의 소재도 불분명합니다. 무엇보다, '인력 비용 상승'이라는 전망이 고급 기술을 가진 상위 일부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나머지에게는 오히려 대체 압력이 더 크게 작동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금 1인 사업자가 확인해야 할 것

이 논의를 한국 1인 사업자와 소규모 기획자의 관점으로 좁히면 실천 가능한 지점들이 보입니다.

지금 하는 반복 업무 중 AI에게 넘길 수 있는 것을 구체적으로 목록화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주당 7.5시간이라는 수치는 저절로 실현되지 않습니다. 어떤 업무를 어떤 도구에 위임할지 직접 설계해야 하고, 그 설계 자체가 이미 사람의 일입니다.

분신을 만들기 전에 분신이 대표할 원본을 먼저 세워 두어야 합니다. AI 아바타가 150개 언어로 발표를 한다 해도, 그 발표의 핵심 관점과 판단 기준은 사람에게서 나와야 합니다. 관점 없이 만든 분신은 빠를 뿐이고, 무엇이 빠른지가 불명확합니다. 자신의 판단 기준을 미리 언어로 정리해 두는 과정이, AI 도구를 도입하기 전에 더 필요한 이유입니다.

채용 현장을 오래 들여다본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변화가 있습니다. 어떤 일을 할 줄 아느냐가 아니라, AI와 함께 어떤 일을 어느 수준까지 끌어올릴 수 있느냐가 판단 기준이 됐다는 것입니다. 한국 1인 사업자에게도 이 기준은 이미 적용되기 시작했습니다. 클라이언트가 혼자서는 낼 수 없는 속도와 밀도로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AI 분신을 소유한 사람이 늘어날수록, 분신을 어떻게 쓸지 판단하는 사람의 자리가 좁아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넓어집니다. 기술이 확산되는 속도와 그것을 제대로 다룰 사람이 길러지는 속도는 항상 어긋납니다. 그 어긋남이 만들어 내는 격차가, 인력 비용 상승의 실제 배경에 가장 가깝습니다.

분신이 150개 언어로 당신 대신 말하는 세상에서도,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는 여전히 당신이 결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