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도구가 실무에 들어오면서 많은 기획자와 PM이 기대했던 그림은 대체로 비슷합니다. 반복적이고 단순한 작업은 AI가, 창의적이고 고차원적인 판단은 사람이. 글쓰기 AI가 초안을 잡아주면 사람은 더 전략적인 고민에 집중할 수 있고, 코드 자동완성 도구가 기본 구조를 채워주면 개발자는 더 복잡한 설계에 시간을 쓸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기대가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닙니다. AI가 이메일 초안을 제안하면 회신 속도가 빨라지고, 반복 포맷의 보고서 작성 시간이 줄어드는 것은 많은 실무자가 직접 경험하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기대가 성립하려면 전제가 있습니다. AI가 처리한 결과물을 사람이 제대로 평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검토자가 검토를 잘할 수 있을 때만 분업이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평가 능력은 그냥 유지되지 않습니다. 직접 수행하지 않는 시간이 쌓이면서 서서히 옅어집니다.

결과물을 검토하는 능력은 그 일을 직접 해본 경험에서 옵니다

2013년 7월 6일, 아시아나항공 214편이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에 착륙하다 활주로 앞 방파제에 충돌했습니다. 탑승자 307명 중 3명이 사망하고 187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이듬해 미국 교통안전위원회(NTSB)가 발표한 사고 보고서는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조종사들의 자동화 과의존을 명시했습니다. 자동착륙 모드에서 수동 모드로 전환된 상황에서, 항공기 고도를 수동으로 조절하는 데 필요한 감각이 충분히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보고서 발표 직후 미국 연방항공청(FAA)은 2013년 8월 항공사들에게 조종사의 수동 비행 시간을 의도적으로 늘리도록 권고하는 안전 지침을 배포했습니다. 자동조종 장치가 정상 비행의 대부분을 처리하더라도, 비정상 상황에서 수동 조종이 요구될 때를 대비한 감각은 주기적으로 훈련하지 않으면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사고를 낸 조종사들이 수동 비행을 처음부터 할 줄 몰랐던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훈련 과정에서는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 않는 시간이 누적되면서 감각이 무뎌진 것입니다. 능력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능력이 활성 상태를 잃은 것입니다.

이 구조는 지식 업무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AI가 기획서 초안을 잡아주면 작성 속도는 빨라집니다. 그런데 그 초안을 앞에 두고 "이 단락의 논리가 약하다", "이 주장에는 이 자리에서 근거가 필요하다", "독자가 여기서 의문을 품을 것이다"라고 식별하는 능력은 어디서 옵니까. 수백 번 직접 구조를 고민하고 고쳐가면서 쌓인 패턴 인식에서 옵니다. 초안을 AI에게 넘기면 그 훈련 과정이 생략됩니다.

처음 6개월, 1년은 이 생략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미 쌓아둔 감각이 남아 있어서입니다. 감각이 옅어지는 것은 그 이후입니다. 그리고 그 시점이 언제인지는, 감각이 필요한 순간이 오기 전까지 알기 어렵습니다.

반복 과정이 내부에 쌓는 것

글을 직접 쓰는 과정을 해체해 봅니다. 빈 화면 앞에서 어떤 주장을 먼저 배치할지 결정합니다. 이 주장이 저 주장보다 앞에 와야 독자가 납득하는지 생각합니다. 어느 단락에서 구체적인 수치가 들어와야 하는지, 어느 대목에서 독자가 끊기는지 예측합니다. 이 결정들이 초안을 작성하는 내내 이뤄집니다. 그리고 이 결정들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기준이 형성됩니다.

AI가 초안을 제공하면, 이 결정들이 AI 내부에서 처리됩니다. 사람은 결과를 받아 "좋다", "아니다"를 말하는 위치로 물러납니다. "좋다"와 "아니다"를 구별하는 능력은 정확히 그 결정 과정을 직접 수행한 경험에서 나옵니다. 그 경험이 더 이상 쌓이지 않으면, 평가 능력은 이미 쌓인 것에만 의존하게 됩니다.

개발자가 코드를 직접 작성하면서 특정 오류가 어떤 증상으로 나타나는지 패턴을 익힙니다. AI가 코드를 생성하고 오류도 찾아 수정한다면, 그 패턴 인식은 어디서 생깁니까. PM이 시장 분석 보고서를 직접 작성하는 과정에서 어떤 지표가 실질적이고 어떤 지표가 표면적인지 감각이 붙습니다. AI가 보고서를 써주면 속도는 올라가지만, 분석의 전제를 의심하는 안목은 쌓이지 않습니다. 콘텐츠 디렉터가 주제 각도를 직접 설정하면서 어떤 접근이 독자에게 닿고 어떤 접근이 뜨는지 감각을 기릅니다. 이 결정을 AI에게 맡기면 기획력의 핵심이 비어갑니다.

이 모든 경우에서 반복이 축적하는 것은 결과물을 식별하는 내부 기준입니다.

같은 결과물, 다른 장기 효과직접 작성·수정결정 과정을 내가 수행오류 패턴이 기억에 쌓임평가 기준이 내부에 형성AI 초안을 검토·수정결정 과정이 AI 내부에서 처리기존 감각으로만 식별 가능감각은 유지 보수 없이 놓임

두 경로는 6개월 이내에는 결과물 품질에서 눈에 띄는 차이를 내지 않습니다. 격차가 드러나는 것은 AI가 예상치 못한 오류를 냈을 때, 또는 AI에게 위탁하기 어려운 복잡한 상황이 닥쳤을 때입니다.

AI에게 넘기지 않을 작업을 의식적으로 정해두는 것

자동조종을 끄고 수동 비행만 하라는 것이 현실적 해법이 아니듯, AI 도구 사용을 줄이는 것이 이 문제의 출발점이 되지 않습니다. 효율을 포기할 이유가 없고, 도구의 장점은 활용하면 됩니다.

단, 어떤 작업을 AI에게 넘기고 어떤 작업을 직접 수행할지 기준을 의식적으로 세울 수 있습니다.

기준의 출발점은 단순합니다. 이 작업을 내가 직접 수행하면서 쌓이는 경험이 내 핵심 역량의 일부인가. 그렇다면 속도를 다소 희생하더라도 직접 하는 편이 장기적으로 유리합니다.

기획자라면 보고서의 논리 구조를 잡는 단계가 해당됩니다. 어떤 주장이 어느 위치에 있어야 하는지, 어떤 근거가 어떤 순서로 배치돼야 설득력이 생기는지 결정하는 과정입니다. 이 단계를 AI에게 넘기면 기획의 핵심을 위탁하는 것과 같습니다. 콘텐츠 디렉터라면 각도 설정 단계입니다. 같은 주제를 어떤 입장에서, 어떤 독자를 위해, 어떤 장면부터 접근할지 결정하는 단계입니다. PM이라면 우선순위의 근거를 세우는 단계입니다. 어떤 지표가 의사결정에서 실질적이고 어떤 지표가 보조적인지 가려내는 과정입니다.

이 단계들의 공통점은 완성된 결과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만들지 결정하는 것입니다.

나머지 — 결정된 구조를 문장으로 완성하는 과정, 포맷을 다듬는 과정, 반복되는 형식의 데이터 정리 — 는 AI에게 넘겨도 핵심 역량이 크게 손상되지 않습니다. 이 구분이 서야 도구가 실력을 확장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합니다.

스마트 기기와 소프트웨어가 빠르게 보급되는 환경에서, 도구를 능숙하게 다루는 능력과 도구가 내놓는 결과를 정확하게 평가하는 능력은 별개입니다. 전자는 빠르게 퍼지고, 후자는 직접 수행한 경험에서만 생깁니다. 어떤 작업에서 계속 그 경험을 쌓을지 스스로 정하는 것, 그것이 자동화가 깊어지는 환경에서 실력을 유지하는 방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