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3억 달러. 블룸버그가 집계한 이 숫자는 지난 1년 사이 미국에서 억만장자 반열에 오른 AI 창업가 19명의 자산 총합입니다. 원화로 환산하면 약 90조 원, 코스피 중형 기업 수십 개의 시가총액에 해당하는 규모입니다. 그런데 이 열아홉 명 가운데 GPT나 클로드 같은 파운데이션 모델을 직접 개발한 창업가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오픈AI도, 앤트로픽도, 구글 딥마인드도 이 명단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이들이 자리를 잡은 곳은 모델의 안쪽이 아니라 모델과 현실 업무 사이의 공간이었습니다. 코드 협업 플랫폼, 프런트엔드 배포 인프라, 법률 검토 자동화, 헬스케어 데이터 처리. 거창한 언어 모델 대신, 낡고 비효율적이며 소프트웨어가 아직 깊이 침투하지 못한 산업의 특정 자리에 AI를 결합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 선택이 어떻게 열아홉 명을 억만장자 명단에 올렸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명단이 가리키는 좌표

블룸버그 분석에서 주목할 것은 숫자 자체보다 이 창업가들이 선택한 시장입니다. 신규 억만장자 대부분은 법률, 헬스케어, 고객서비스, 소프트웨어 개발 분야에서 "전문직을 위한 AI 어시스턴트" 구축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이 산업들의 공통점은 오래됐고, 프로세스가 복잡하며, 지식 집약적인 반면 자동화 비율이 낮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비효율이 수십 년 동안 방치된 곳입니다.

코드 협업 플랫폼 리플릿(Replit)은 이 흐름의 한 축을 보여줍니다. 리플릿이 구축한 것은 코드를 한 줄도 쓸 줄 모르는 사람이 자연어 명령만으로 앱을 만들어낼 수 있는 개발 환경입니다. "개발자를 위한 툴"이 아니라 "비개발자가 개발자가 되는 플랫폼"으로 시장을 다시 정의하면서, AI 확산이 만들어낸 새로운 수요층을 흡수했습니다. 프런트엔드 배포 플랫폼 버셀(Vercel)은 AI 기반 웹 서비스가 급증하면서 개발과 배포 사이의 인프라를 담당하는 자리에서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AI 칩 제조사 세레브라스(Cerebras)에서는 한 회사에서 두 명의 억만장자가 동시에 탄생했습니다. 앤드루 펠드먼 CEO의 지분 가치는 약 32억 달러, 기술책임자 션 리의 지분 가치는 약 17억 달러로 평가됩니다. 세레브라스는 GPU 중심으로 재편된 AI 칩 시장에 대안 아키텍처를 들고 진입하면서, 엔비디아 의존도를 분산하려는 기업 수요를 파고든 케이스입니다. 모델 회사가 아니지만, AI 모델이 돌아가는 인프라 계층에서 차별화된 위치를 확보했습니다.

이들의 선택을 관통하는 공통 논리는 하나입니다. 파운데이션 모델 개발에는 수조 원 단위의 컴퓨팅 자원과 수천 명의 연구 인력이 필요합니다. 오픈AI, 구글, 메타가 그 전선에서 벌이는 경쟁은 사실상 소수 거대 자본 간의 싸움으로 굳어지고 있습니다. 대신 이 열아홉 명은 그 모델들이 만들어진 뒤 이를 어디에,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라는 다른 질문에 집중했습니다.

부가가치의 무게 중심이 옮겨가는 방향

AI 모델이 API 형태로 점점 더 쉽게 접근 가능해질수록, 모델을 보유하는 것 자체의 희소성은 줄어듭니다. 기업 입장에서 오픈AI API를 쓸지, 클로드 API를 쓸지, 오픈소스 모델을 직접 운용할지는 이미 선택 가능한 조건이 됐습니다. 이 전제 아래, 경쟁 우위는 어떤 모델을 쓰느냐보다 그 모델을 어떤 프로세스에 얼마나 깊이 통합했느냐로 이동합니다.

법률 업무를 예로 들면, 계약서 검토에 AI를 적용하는 것 자체는 어느 스타트업이든 며칠 안에 시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특정 법률 분야의 표준 계약 유형, 해당 업계 특유의 분쟁 패턴, 고객사 특성에 맞게 누적된 수천 건의 검토 이력을 AI 파이프라인에 통합한 것은 단기간에 복제하기 어렵습니다. 모델 자체보다 그 위에 쌓인 도메인 데이터와 프로세스 설계가 실질적인 진입 장벽이 되는 이유입니다.

헬스케어도 같은 논리로 읽힙니다. 의료 차트 요약, 임상 기록 분류, 보험 청구 검토 같은 업무는 AI가 처리할 수 있는 반복 작업이지만, 병원별 데이터 형식의 차이, 의료 규제 환경, 보험사 계약 구조에 맞게 시스템을 조율하려면 해당 업계를 오래 다뤄온 지식이 선행돼야 합니다. 기술 스택보다 도메인 지식이 먼저인 시장에서는 기술만 들고 외부에서 진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 점이 벤처 투자자들의 시각이 바뀐 지점이기도 합니다. 모델 개발팀의 연구 역량보다, 특정 산업의 데이터 흐름을 가장 깊이 이해하고 그것을 AI 파이프라인으로 전환할 수 있는 창업팀을 찾는 흐름이 뚜렷해지고 있습니다. 어떤 시장에서든 살아남는 스타트업은 극소수이며, 그 극소수를 판별하는 기준으로 기술 우위보다 도메인 깊이를 먼저 보는 시각입니다. 오래 투자해온 VC들이 공통적으로 꺼내는 논거가 바뀌고 있다는 것은, 시장에서 검증되고 있는 패턴이 달라지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낙관론에는 조건이 붙습니다

응용 계층이 부가가치를 가져간다는 주장은 타당하지만, 이것이 언제까지나 성립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가장 직접적인 위협은 모델 회사들의 수직 통합입니다. 오픈AI가 특정 수직 시장에 직접 진출하거나, 동일한 기능을 자사 제품에 흡수하면 그 위에 구축된 응용 레이어 스타트업의 차별성은 빠르게 좁아집니다. 이미 오픈AI는 기업용 제품 라인을 확장하면서 일부 스타트업이 API로 구축하던 기능을 직접 제공하기 시작했다는 지적이 실리콘밸리 내부에서도 나옵니다.

세레브라스의 경우도 냉정하게 봐야 합니다. AI 칩 열풍 속에 화려하게 상장한 주가는 이후 큰 폭의 변동성을 보였습니다. 기대와 밸류에이션 사이의 격차가 공개 시장에서 직접 드러난 사례였습니다. 19명의 자산 총합 593억 달러 상당 부분이 비상장 스타트업의 지분 평가에 기반한다는 점에서, 이 숫자가 공개 시장에서 검증된 실물이 아닐 수 있다는 점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더 구조적인 반론은 이렇습니다. 응용 레이어가 살아남으려면 도메인 데이터와 고객 관계, 두 가지를 동시에 확보해야 합니다. 데이터가 있어도 고객 관계가 약하면 경쟁사에 대체되고, 고객 관계가 있어도 데이터 우위가 없으면 모델 회사의 직접 진출 앞에서 취약해집니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쌓은 스타트업은 실제로 많지 않습니다. 억만장자 19명은 그것을 해낸 케이스를 1년 뒤에 확인한 결과이지, 그 경로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이 숫자에서 뽑아낼 실용적 질문

억만장자 이야기를 한국의 1인 창업자나 솔로 디렉터에게 직접 대입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규모도, 자본도, 생태계도 다릅니다. 그러나 이 데이터가 제기하는 실용적 질문은 스케일과 무관하게 유효합니다.

당신이 현재 하는 일에서 가장 반복적이고 지식 집약적이며 아직 자동화되지 않은 프로세스는 무엇입니까. 클라이언트 제안서 작성, 시장 리서치 정리, 계약 협의 전 정보 수집, 콘텐츠 초안 작성. 이 가운데 AI를 가장 깊이 심을 수 있는 자리는 어디이며, 그렇게 했을 때 지금보다 처리량이 몇 배 늘어납니까. 그리고 그 자리에 당신만큼 깊이 들어갈 수 있는 경쟁자는 얼마나 있습니까.

억만장자 19명을 가른 변수도 결국 이 마지막 질문에서 나왔습니다. 내가 가장 잘 아는 프로세스에 AI를 결합하는 것이 서비스 모델의 차별화가 되려면, 그 프로세스에 대한 이해가 복제하기 어려운 수준이어야 합니다. 챗GPT를 업무에 써보는 것은 시작점이지만 그 자체로 해자가 되지는 않습니다. 특정 고객 유형, 특정 업무 흐름, 특정 데이터 환경에서만 작동하는 AI 파이프라인을 구축했을 때 비로소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한국의 1인 사업자라면 자신이 오래 다뤄온 분야 — 콘텐츠 제작이든, 영업 관리든, 교육 커리큘럼 설계든 — 에서 그 자리가 어디인지를 가장 먼저 파악하는 것이 출발점입니다.

파운데이션 모델 경쟁은 이미 소수 거대 자본의 영역으로 굳어지는 중입니다. 블룸버그 명단에 오른 19명은 그 경쟁 대신 다른 곳을 선택했습니다. 모델을 만드는 쪽이 아니라, 모델이 들어갈 자리를 가장 깊이 이해하는 쪽에 서는 것이었습니다.

593억 달러는 그 선택이 1년 동안 만들어낸 결과를 집계한 숫자입니다. 어떤 업종에서든 자신의 도메인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AI와 가장 먼저, 가장 깊이 만날 때 어떤 일이 생기는지를 보여주는 데이터입니다. 지금 당신이 서 있는 자리가 그 방향과 얼마나 맞닿아 있는지 점검해볼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