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지노모토는 1909년 창업한 일본 식품 회사입니다. 지금도 전 세계 MSG 시장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020년대 들어 이 회사의 이름이 반도체 업계 분석가들의 보고서에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식품 사업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아미노산 연구를 통해 개발된 특수 절연 필름 소재가 AI 연산에 사용되는 고성능 반도체 패키징의 핵심 부품이 된 것입니다.

같은 시기, 세계 최대 위생도기 제조사인 토토(TOTO)도 비슷한 궤적을 그렸습니다. 온수 세정 변기 기술로 60년 넘게 쌓아온 정밀 소재와 센서 역량이 AI 기반 건강 모니터링 기능으로 이어졌습니다. 배뇨 패턴 분석을 통해 당뇨·신장 질환의 초기 지표를 감지하는 제품이 일본 의료·보험 시장에서 구체적인 사업화 단계를 밟고 있습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2026년 5월 이 두 회사를 하나의 현상으로 분석했습니다. AI 호황기의 수혜자가 엔비디아나 오픈AI 같은 IT 기업만이 아니라는 것, 변기와 조미료처럼 수십 년 된 아날로그 업종에서 오히려 더 조용하고 안정적인 AI 관련 수익이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한국의 1인 사업자·솔로 창업자에게 시사하는 바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아미노산 회사가 AI 칩 공급망에 들어간 경위

아지노모토 빌드업 필름(ABF)은 반도체 기판에 사용되는 절연 소재입니다. 아미노산 화합물의 특성을 수십 년간 연구하는 과정에서 파생된 기술로, 1990년대 후반부터 인텔 등 주요 반도체 제조사에 공급되기 시작했습니다. AI 연산 수요가 급증하면서 이 소재의 공급 부족이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의 병목 중 하나로 거론될 만큼 전략적 가치가 커졌습니다. 아지노모토는 AI 칩을 만들지도, AI 소프트웨어를 개발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전 세계 주요 AI 칩 안에 이 회사의 소재가 들어 있습니다.

토토의 경로는 다릅니다. 변기라는 제품 카테고리는 수십 년 동안 기술 혁신의 언저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 특유의 정밀 제조 문화 속에서 토토는 워시렛(온수 세정 변기)에 소형 히터, 정밀 수류 제어, 착좌 감지 센서를 집적하는 기술을 꾸준히 발전시켰습니다. 이 기술 스택이 배뇨 데이터 수집·분석 기능으로 확장됐고, AI 모델이 처리할 수 있는 생체 데이터를 일상 공간에서 자동으로 수집하는 인프라가 됐습니다. 회사 입장에서 변기는 여전히 변기이지만, AI 헬스케어 생태계 입장에서 그 변기는 데이터 수집 단말입니다.

두 회사의 공통점은 AI를 직접 개발하거나 AI 서비스를 판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AI 생태계가 필요로 하는 소재·부품·데이터 수집 인프라를 수십 년의 업력으로 공급합니다. 이코노미스트는 이 포지션을 AI 호황의 간접 수혜자indirect beneficiaries​로 묘사했습니다. 직접 AI를 만들지 않아도, AI가 굴러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무언가를 오래전부터 공급해온 사업자가 수익을 거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례가 1인 사업자에게 낙관론으로 소비되면 곤란한 이유

이 사례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전에 냉정하게 따져볼 지점이 있습니다.

아지노모토 ABF의 성공은 전략적 선견지명보다 장기 연구 투자와 우연한 기술 적합성의 결과에 가깝습니다. 이 회사가 1990년대에 반도체 시장의 장기 성장을 예측하고 절연 소재 개발에 나선 것이 아닙니다. 아미노산 화학을 오랫동안 깊이 연구하다 보니 특수한 분자 구조의 필름 소재가 만들어졌고, 그것이 반도체 업계의 필요와 맞아떨어진 것입니다. 대규모 연구개발 조직을 수십 년간 유지할 수 있었던 대기업이었기에 가능한 결과였습니다.

반론도 분명히 있습니다. 아지노모토나 토토는 수십 년의 자본 투자와 수백 명의 연구 인력이 만들어낸 독점적 기술 포지션을 가진 회사입니다. 중소 규모의 제조업체나 1인 사업자가 이 경로를 재현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특히 한국의 소규모 사업자들은 대기업 하청 구조나 플랫폼 의존성 안에 갇혀 독립적인 기술 역량을 축적할 여유 자체가 제한돼 있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아날로그 업종에도 AI 기회가 있다"는 메시지를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소비하면, 자본과 규모를 갖춘 사업자에게만 유효한 이야기를 1인 창업자가 자신의 상황에 투영하는 오류가 생깁니다.

이 비판은 상당 부분 맞습니다. 다만 두 회사의 사례에서 규모를 걷어내면, 작동 방식은 단순합니다. AI가 필요로 하는 무언가를 가진 사람이 수혜자가 됩니다. 그 무언가의 형태가 특수 소재일 수도 있고, 특정 현장의 데이터일 수도 있고, AI가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현장 경험일 수도 있습니다. 규모가 크지 않아도 희소하면 가치가 생깁니다.

20년간 한 지역에서 부동산 중개업을 해온 사람은 그 지역의 비공개 거래 이력과 건물 상태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10년간 소규모 제조 현장을 운영해온 사람은 특정 공정의 불량 패턴과 현장 대응법을 축적하고 있습니다. AI 서비스 회사들이 이런 데이터를 인터넷에서 수집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변기 회사가 배뇨 데이터에 대한 독점적 수집 인프라를 가진 것처럼, 오래 한 업종에서 일해온 사람들도 AI가 복제하기 어려운 데이터 접근성과 현장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겹치는 지점에서 거래가 발생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아날로그 사업자가 AI 생태계에서 찾을 수 있는 역할들

일본 사례의 구조를 한국 소규모 사업 환경으로 옮기면 몇 가지 구체적인 경로가 보입니다.

특정 업종에서 오래 일한 사업자가 축적한 비정형 데이터는 AI 학습에 필요하지만 온라인에서 구하기 어려운 자원입니다. 현장 사진, 고객 상담 기록, 지역별 거래 관행, 특수 공정의 실패 사례 등이 여기 해당합니다. 이를 AI 서비스 개발사에 공급하거나, 특화된 학습 데이터셋 형태로 정리해 판매하는 계약이 일부 업종에서 이미 성사되고 있습니다. 이 거래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해당 업종에 머문 시간과 그 안에서 쌓인 기록입니다.

AI가 생성한 결과물을 현업 기준에서 검토하고 완성하는 역할도 있습니다. 법률 문서 초안을 AI가 작성하면 변호사가 교열하고, 의료 정보를 AI가 정리하면 임상 경험자가 검토합니다. 이 작업은 해당 분야에서 수년 이상 실무를 해온 사람만 감당할 수 있습니다. AI 도구가 고도화될수록 이 검증 역할의 시장가치는 올라가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이 역할을 수행하는 프리랜서들이 단가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는 사례들이 보고되고 있습니다.

현장 실행 역할도 있습니다. AI 에이전트가 아무리 발전해도 실제 인테리어를 하고, 현장 인터뷰를 진행하고, 특수 소재를 가공하는 것은 여전히 사람의 몫입니다. AI가 기획·분석·커뮤니케이션 단계를 자동화할수록 '마지막 실행 단계'를 담당하는 역량이 별도의 사업 가치를 갖게 됩니다. 소규모 인테리어 시공업체, 현장 촬영 전문가, 지역 기반 물류 사업자 등에서 이 흐름이 조금씩 감지되고 있습니다.

오래 한 분야에서 업무를 반복해온 실무자들이 공통적으로 발견하는 순서가 있습니다. 자신이 반복적으로 잘 수행하고 있는 업무 안에서 가장 시간이 많이 드는 병목을 먼저 찾고, 그 병목을 AI 도구로 줄인 뒤 확보된 시간을 고객 접점 확대나 검증 역할 수주에 씁니다. 이 순서가 거꾸로 되면 AI 도구만 늘고 수익 구조는 그대로인 상황이 됩니다. MSG 회사가 아미노산 연구를 깊이 파고들다 반도체 소재를 발견했듯, 현재 하고 있는 일 안에서 병목과 희소 자원을 먼저 찾는 것이 출발점입니다. AI 도구를 먼저 도입하고 나서 쓸 곳을 찾는 순서로는 이 구조가 잘 작동하지 않습니다.

아지노모토와 토토가 수십 년을 해온 일 안에서 AI가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영역을 발견했을 때, 그 영역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거래 가능한 자원이 됐습니다. 새로운 AI 사업으로 뛰어드는 것과는 다른 경로입니다. 한국의 1인 사업자에게 이 이야기가 던지는 질문도 그 자리에 있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 안에서 AI가 복제하기 어려운 부분이 어디인지, 그리고 그 부분이 누군가에게 어떤 방식으로 팔릴 수 있는지 들여다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