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미국 AI 스타트업 한 곳이 제품을 한 번도 출시하지 않은 상태에서 10억 달러, 우리 돈으로 약 1조 4천억 원의 초기 투자를 받았습니다. 계약 소식이 알려지자 언론은 역대 최대 시드 라운드라는 헤드라인을 달았고, 업계 뉴스레터들은 이 딜을 며칠에 걸쳐 분석했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가장 담담하게 지나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수십 년 동안 벤처 수익률 데이터를 손에 쥐고 살아온 투자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 있었습니다. 역대 가장 큰 초기 투자를 받은 스타트업들의 수익률이 벤처 포트폴리오 안에서 하위권에 몰리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화제를 모은 딜일수록, 들어간 가격이 높아서, 회수할 때 투자자가 가져가는 배수(multiple)가 낮아지는 패턴입니다. 이 현상을 LP와 VC 사이의 수익률 다툼으로만 보면 지나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패턴이 작동하는 방식을 들여다보면, 한국에서 솔로로 사업을 시작하거나 1인 기획으로 새 사업을 설계하는 사람들이 매일 내리는 의사결정과 구조가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아무도 예상 못 한 규모가 반복되는 이유
2024년 하반기부터 2025년에 걸쳐 AI 스타트업 초기 투자 규모가 급격히 올라갔습니다. 과거에는 수십억 원 수준이었던 시드 라운드 평균이 일부 AI·바이오테크 분야에서 수백억, 더 나아가 수천억 원대로 이동했습니다. 단일 라운드에서 10억 달러를 넘어서는 딜이 2025년 상반기에만 수차례 보고되었고, 그중에는 창업 후 1년도 안 된 회사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현상의 배경을 보면 비용 구조 변화와 투자업계 내부의 구조적 압박이 함께 작용하고 있습니다. AI 모델을 학습시키는 데 필요한 GPU 클러스터 비용이 크게 오른 것이 하나의 배경입니다. 이 분야에서 경쟁하려면 처음부터 충분한 자본이 필요하다는 내러티브가 투자자와 창업자 모두에게 빠르게 퍼졌습니다. 수조 원 규모 펀드를 운용하는 대형 VC들은 배치 압박을 받기도 합니다. 작은 딜을 수십 개 집행하는 것보다 큰 딜 몇 개를 집행하는 편이 운영 부담이 낮고, 헤드라인을 장식한 투자는 LP를 향한 브랜딩으로도 기능합니다. 이 두 힘이 맞물리면서 크게 받고 빠르게 성장하는 회사가 좋은 회사라는 등식이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통용되기 시작했습니다.
문제는 이 등식이 역사 데이터와 충돌한다는 점입니다. 여러 벤처 데이터 분석 기관의 보고를 보면, 실제 벤처 수익률 상위권을 차지한 회사들 중 초기에 거대한 자본을 조달한 경우는 생각보다 드뭅니다. 반대로 처음에 작게 시작해서 제품과 시장 사이의 접점을 먼저 확인하고 이후에 자본을 본격적으로 투입한 사례들이 배수 기준으로 훨씬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진입 가격이 높아지면 수익의 천장도 낮아집니다
벤처 투자의 수익 구조는 산술적으로 명확합니다. 투자한 시점의 밸류에이션과 회수할 때의 밸류에이션 차이가 이익입니다. 시드 단계에서 이미 높은 밸류에이션으로 계약을 맺으면, 그 회사가 뛰어난 성과를 내도 투자자가 받을 수 있는 배수가 낮아집니다. 100에 들어가서 10배 수익을 내는 것과 1,000에 들어가서 3배 수익을 내는 것은 같은 성공처럼 보이지만, 포트폴리오 전체 수익률을 계산할 때는 전혀 다른 결과입니다.
벤처 역사에서 배수 기준 상위권을 차지한 투자들을 거슬러 올라가면 반복되는 패턴이 있습니다. 창업자가 초기에 작게, 필요한 만큼만 외부 자본을 조달하고, 시장에서 실제로 돈을 낼 사람이 있다는 것을 먼저 확인한 뒤에 본격적인 투자를 유치한 경우입니다. 나중에 수십 조 규모 기업으로 성장한 회사들 가운데 상당수가 첫 외부 투자를 수십억 원 이하로 유지했습니다. 이들이 작게 시작한 것이 선택지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더 유리한 조건을 만든다는 구조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투자자들은 이 패턴을 알면서도 거대한 시드 라운드에 참여할까요. LP에게 정기적으로 "우리 펀드는 이 시대의 중요한 딜에 참여하고 있다"는 증거를 보여줘야 합니다. 헤드라인에 오른 딜은 그 증거로 기능합니다. 수익률 극대화와 펀드 생존이 때로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구조에서, 대형 VC는 배수보다 브랜드를 택하는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크게 시작해야 한다는 주장이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닙니다
물론 이 논리에 강한 반론이 있습니다. AI 인프라처럼 자본 집약도가 높은 분야에서는 처음부터 충분한 자본이 없으면 경쟁 진입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시각입니다. 범용 AI 모델을 개발하는 데는 GPU 클러스터 구축 비용만으로도 수백억 원이 필요합니다. 동일한 아이디어라도 더 빠르게, 더 넓게 실행한 쪽이 시장을 차지하는 분야라면 초기 자본이 사실상 시간을 사는 수단이 됩니다. 처음부터 크게 받지 않으면 경쟁 자체를 못 한다는 논리입니다.
이 반론은 특정 영역에서 설득력이 있습니다. 핵융합 에너지, 바이오 신약 개발, 반도체 설계처럼 기초 연구와 인프라 투자가 선행되어야 하는 분야는 자본 없이는 시작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이런 영역에서 자본 효율성을 먼저 생각하라는 처방은 현실을 무시한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2025년의 메가 시드 라운드 대부분은 이 영역과 다른 곳에서 발생했습니다. 많은 비용이 드는 분야가 아니라, 많은 비용이 든다는 내러티브가 통용되는 분야에서 발생했다는 관찰이 더 정확합니다. 실제로 벤처 수익률 상위권을 차지한 SaaS, 마켓플레이스, 미디어·콘텐츠 분야 회사들을 보면, 시드 단계에서 10억 달러가 필요했던 사례는 드뭅니다. 비용이 커서 자본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가 먼저 만들어지고 그 이야기에 따라 자금이 흘러간 것입니다.
검증 순서를 먼저 정하면 자본의 무게가 달라집니다
저는 이 구조가 규모와 무관하게 반복된다는 점을 주목합니다. 한국에서 솔로 창업을 하거나 1인 사업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마주하는 결정들을 들여다보면, 메가 시드 라운드의 논리가 작은 규모에서도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반복됩니다.
사업 초기에 장비를 먼저 갖추고 공간을 만들고 마케팅 예산을 선행 투입해야 한다는 생각들이 결국 같은 방향으로 작동합니다. 자본을 먼저 쓰고 검증은 나중에 하는 순서입니다. 시드 라운드에 수조 원이 들어가건, 개인 통장에서 수천만 원이 나가건, 결과보다 자원을 먼저 투입하는 구조는 같습니다.
데이터가 가리키는 방향은 반대입니다. 자본 없이 증명할 수 있는 것을 먼저 증명하고, 그 결과를 근거로 자원을 투입하는 순서가 더 오래 살아남는 사업을 만드는 데 유리합니다. 이 순서는 자본이 클수록 지키기 어렵습니다. 투자자가 빠른 성과를 기대하는 시점이 있고, 그 기대에 맞추려면 빠르게 돈을 써야 한다는 압박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자본이 작을수록 이 압박이 줄어들고, 검증 순서를 지킬 여유가 늘어납니다.
한국의 벤처 투자자들이 공통적으로 언급하는 패턴이 있습니다. 가장 좋은 투자는 아무도 관심 두지 않을 때, 아직 가격이 형성되지 않은 시점에 들어간 딜이었다는 것입니다. 헤드라인을 장식한 딜에서 큰 수익이 났다는 이야기는 드물었고, 아무도 쳐다보지 않던 자리에서 아직 1퍼센트의 가능성으로 보이던 것을 먼저 포착했다는 이야기가 훨씬 많았습니다. 이 관찰은 벤처 세계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솔로 사업자가 기회를 발굴하는 방식, 아직 주목받지 않은 시장 공간을 먼저 선점하는 전략과 논리 구조가 같습니다.
경쟁자가 크게 움직인다고 해서 같은 방식으로 따라갈 이유는 없습니다. 대규모 자본을 투입한 경쟁자는 그 자본에 비례하는 압박을 받습니다. 빠른 지표 증명, 매출 성장을 보여야 하는 조급함이 투자 규모만큼 커집니다. 자본이 적은 쪽은 다른 속도로 움직이며 다른 순서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지금 사업에서 크게 시작해야 한다는 판단이 실제 비용 구조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시장에서 통용되는 내러티브를 따른 것인지 구분하는 일이 출발점입니다. 그 구분이 초기 자원 배분의 방향을 바꿉니다.
크게 주목받은 딜들이 수익률 하위권에 몰린 것은 가격이 결과보다 먼저 매겨졌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관심 두지 않는 자리에서, 아직 이름도 붙지 않은 가능성을 먼저 포착한 쪽이 나중에 더 여유로운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 순서는 10억 달러 규모의 시드 라운드에서도, 자본금 몇 백만 원으로 시작한 1인 사업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